창덕궁

 

창덕궁은 1997년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으로 등재된 우리나라의 자랑스러운 고궁이다. 

한국을 대표하는 궁궐했을때 사람들은 전부 경복궁을 말하지만 경복궁이 제기능을 한건 임진왜란 전 까지. 

임진왜란때 전소된 이후 200년간은 창덕궁이 법궁이자 정궁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창덕궁의 역사를 보자면, 태종이 1404년에 공사를 시작해 1405년에 완성한 궁궐이다.

원래 태조 이성계는 경복궁을 조선의 법궁으로 세우고 500년 왕조를 열었지만(근데 이성계도 창덕궁에서 승하함)

태종 이방원이 왕자의 난이라는 피바람을 일으킨 궁이다 보니 기피해서 창덕궁을 지은 것이다.

 

 

 

창덕궁 설계도

 

 

경복궁은 중앙축을 중심으로 건물 배치를 한 나름 규율있게 지어진 반면,

창덕궁은 전각들이 지형을 따라 흩뿌려진것마냥 지어졌어 그래서 궁궐의 정문과 정전이 완전히 틀어져 버린 것.

이런 배치는 동서고금을 만연하고 찾아보기 힘들정도이며, 창덕궁은 한국만의 독특한 배치를 가진 궁궐이라 할 수 있다.

 

 

 

 

 

창덕궁의 총 책임자는 박자청이란 인물로 환관이였음에도, 장관급인 판서자리에 까지 올랐던 인물이다.

또한 경복궁에서 가장 아름답다던 경회루를 설계한 사람도 바로 이 박자청.

근데 이 박자청은 사실 엄청난 강심장이자 배짱아였다고 볼 수 있는데,

 

 

 

 

 

태종이 박자청에게 인정문의 밖의 마당을 똑바로 직사각형으로 만들라고 지시를 했는데,

이를 씹고 그냥 사다리꼴로 만들었고,

이것때문에 복도로 쓰여야할 건물까지 허물고 다시 지으라니까 거다가는 그냥 담만 쌓아버렸다.

 

 

 

 

 

 

결국 태종은 나사가 풀려 귀양까지 보냈으나 금방 복귀했고 다시 총책임자로 인명됐다. 

형제를 죽이고 궁궐에 피바람을 일으켜 정권을 잡았던 태종 이방원의 뜻을 꺾어버렸으니

정말 배짱이 대단했던 인물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중국 북경의 자금성

 

 

조선 초기부터 왕들은 경복궁을 피하는 경향이 좀 있는데,

아무래도 지금같이 나무나 녹지가 있는게 아니라 온통 전각뿐이니 숨이 턱 막히고 사람살기에 답답하다고 느꼈을 듯.

이는 한국만 그런게 아니라 중국도 비슷해 자금성 정말 어마어마하게 크고 전각들 하나하나가 왠만한 건물 크기다.

그래서 중국의 명.청대 황제들도 자금성뿐 아니라 넓은 정원과 호수가 갖춰진 중난하이에도 많이 머물렀다고 한다.

 

 

 

임진왜란

 

 

그렇게 시간이 흘러 정말 한국사에서 조선 전기와 후기를 구분짓는 만큼 굉장히 중요한 전쟁인 임진왜란이 발발했다.

이때 경복궁은 노비놈들이 노비문서 없앨려다 전각에 불을 질렀는데 이게 번져서 전소되고,

창덕궁은 당시 왜군들이 모두 불질러 태워버렸다.

 

 

 

흥선 대원군

 

 

그러다 인조때 되서야 경복궁 대신 창덕궁을 복원 시키면서 부활했다.

이는 근대에 흥선대원군이 조선 경제를 박살 내가면서 다시 경복궁을 지을때까지 사용되었는데,

한마디로 조선 중후기는 이 창덕궁이 조선 왕조의 정궁이라 할 수 있겠다.

 

 

 

창덕궁 인정전

 

 

창덕궁이 경복궁 대신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이유로는 보존이 나름 잘 되있었기 때문이다.

돈화문,인정전,신정전등 많은 건물들이 원형 그대로 남아 있어 그 가치가 높았다.

반면 경복궁은 일제가 85%를 허물고, 근정전 앞에는 조선총독부를 세워 우리의 자존심을 짓밟았지

만약 경복궁이 근대에 복원되지 않았더라면 도리어 창덕궁이 그 치욕을 당했을 것이다. 

 

 

 

창덕궁 인정문

 

 

인정문은 인정전으로 들어가기 위한 문으로 왕위 계승의 준비 장소였다.

조선 전기에는 연산군이 중기때는 효종, 현종, 숙종, 영조 

후기때는 순조,고종이 이곳을 거쳐서 왕위에 즉위했다. 

 

 

 

창덕궁 인정전

 

 

인정전은 창덕궁의 정전이자 태종때 지어졌는데, 이때는 지금보다 규모가 작았다고 한다. 

그리고 임진왜란때 왜군들이 태워버리고 이후 광해군 때 복원되어 

기능을 상실한 경복궁의 근정전 대신 이곳에서 행사나 식이 거행되었다. 

인정전은 창덕궁의 특징인 자연과의 조화과 가장 잘 나타난 건물이다.

뒤에 나무와 숲등이 어색하지 않고 아름답게 잘 어울러져 있기 때문.

 

 

 

인정전의 기와

 

 

그러다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황실 문양이였던 이화문양을 용마루에 박아 넣었고, 

 

 

 

 

 

인정전의 창호색은 원래 근정전과 같은 색이였으나 황제를 뜻하는 노랑색으로 바꿨고

 

 

 

 

 

내부는 노란색 천으로 장식한 커튼과 천 그리고 전구등을 설치했다.

그리고 옥좌(용상)의 색깔은 원래 갈색이지만 이때부터 황색으로 만든 옥좌(용상)을 썼다.

자기 나름대로 황제임을 나타내려 꾸몄던 것.

 

 

 

일제강점기 인정전

 

 

하지만 일제가 창덕궁 인정전 뜰에 있던 품계석을 모두 없애고,

뜰에 화초나 잡초를 심어 훼손하였다.

지금 품계석 복원과 잡초제거는 모두 1994년 김영삼 정권때 이루어진 것이다.

 

 

 

창덕궁 선정전
창덕궁 선정전

 

 

선정전은 창덕궁의 편전으로 유일하게 청색 기와를 사용해 쌓은 건물이다.

근대에 들어서 인정전과 마찬가지로 전기시설이 들어섰지만,

일제강점기때 복도각을 헐어버리면서 훼손시켰다. 

결국 1885년에 보물 제814호에 지정되면서 복원 작업을 거쳐 1997년에 복원된 것이다.

 

 

 

창덕궁 희정당

 

 

조선의 왕이 침전으로 이용하던 건물이였으나, 선정전에서 했던 편전의 기능을 희정당으로 옮겼고

선정전은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시는 건물로 쓰이게 되었다. 

그러나 1917년 화재가 나서 전소가 됬었고 이를 복원하겠다고

일제가 경복궁의 침전인 강녕전껄 뜯어다가 재건시켜 버렸다.

 

 

 

희정당의 내부

 

희정당의 내부를 보면 근대 역사가 느껴지는데,

기존 궁궐이 아닌 쪽마루에는 카펫이 깔려있고 창문에는 유리가 끼워졌으며 

천장에는 샹들리에가 설치되는등 서양식 문물이 설치되어 있다.

 

 

 

창덕궁 후원(비원)
창덕궁 후원(비원)
창덕궁 후원(비원)

 

 

창덕궁 후원은 우리 선조들이 얼마나 자연을 중요시 했는지 잘 보여주는데,

정궁 안에 이런 화원을 만들어 나지막한 언덕, 계곡과 어우러진 숲과 정원은 가히 아름답다고 할 수 있다.

 

 

 

창덕궁 대조전

 

 

대조전은 희정당과 마찬가지로 1917년 화재때 소실됬는데,

일제는 이걸 복원하겠다고 이번엔 경복궁 왕비 침전인 교태전 헐어 얻은 자재로 복원했다.

그리고 마지막 황제였던 순종황제가 붕어한곳이 이 대조전이고 

1910년 나라를 뻿길때도 이 대조전에서 조선왕조가 끝났다.

 

 

 

창덕궁 낙선재
창덕궁 낙선재

 

 

낙선재는 헌종이 후궁을 위해 지은 전각이였는데,

이게 훗날엔 왕이 죽고 그 왕비가 소복차림으로 잠깐식 머물렀던 장소다.

우리에게는 마지막 황족이였던 영친왕과 이방자가 머물던 곳으로 유명하다.

특징이 있다면 너무 궁궐같지 않을정도로 소소하게 지어졌단 것. 

 

 

 

창덕궁 성정각

 

 

성정각은 왕세자가가 학문을 갈고 닦기 위해 공부를 했던 곳이다.

정면 6칸에 측면 2칸 ㄱ 자 형태의 작은 전각으로 반대편에 바로 왕세자의 서고와 도서실이 있다.

 

 

 

창덕궁 영화당

 

 

영화당은 부용지 동쪽에 있는 전각으로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각지붕을 하고 있다.

광해군때 신축됬으나 현재 전각은 1692년 숙종이 다시 만든거라 전해진다.

 

 

 

조선시대에 그려진 창덕궁, 동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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