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1년 박정희 소장(당시의 계급)은 '구국혁명'으로 집권한다.

 

 

 

구국의 영웅 박정희 전 대통령




박정희 대통령은 정권을 취득하고 나서 1962년부터 오늘날의 대한민국을 만든 '경제개발 5주년 계획'에 착수한다.
처음 박정희 대통령의 야심은 어마어마했다. 

정유, 비료, 화학섬유, 시멘트, 제철, 철도 차량, 조선, 자동차, 기계공업 등을 육성하고 싶어했지만...
당시의 상황은 전쟁의 페허 속에서 미국 원조나 받아먹고 사는 나라였기에 모든 것이 무리였다.
어쩔 수 없이 박정희 대통령은 목표를 하향 조정하여 먼저 자립경제 기틀부터  잡기로 한다.

 

 

 




박정희 대통령은 수출만이 살 길이라고 외치며 수출품 생산에 전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이 당시 한국이 수출하던 제품들은 박정희 대통령 하면 떠오르는 중공업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 당시에는 오징어, 누에, 석탄 등이 주력 수출품이었고, 심지어 쥐털과 사람 머리털까지 팔았다.

하지만 이 정도로는 박정희 대통령이 꿈꾸는 경제 발전에는 턱없이 모자랐다.

 

 

 





수출이 늘어나면서 다소 경제 지표는 좋아졌지만, 경제 발전의 한계는 분명했다.
'외화'가 없었던 것이다.
공업화를 달성하지 못한 상태에서 지금 이대로의 원자재 수출만으로는

집안에 있는 걸 내다팔면서 급전을 마련하는 것에 불과했다.

 


1962년, 박정희 대통령은 여러가지 사업들을 포기해야 했지만 제철 사업만은 포기하지 않았다.

하지만 외자가 없어서 끝내 결렬되고 말았다.
그 한을 간직한 박정희 대통령은 기어코 포항제철 건설을 이룩하지만 그것은 먼 훗날의 이야기로,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근심은 나날이 깊어지고 있었다.

 

 

 

 




이른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예측대로라면 1966년에 끝날 예정이었다.
문제는 외화가 없는 상태에서 2차 계획을 세워도 희밍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자칫하면 국내 경제가 외국 자본에 지배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었지만,

모험을 하는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바로 외국 자본을 들여오는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극빈국이던 대한민국에 돈을 빌려주겠다는 나라는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다.
박대통령은 거의 구걸하다시피 외자를 구하려 애썼다. 아니 한 나라의 지도자가 구걸을 하였다.
돈을 마련해서 그 돈으로 반드시 공업화를 이룩해야한다는 박정희 대통령의 신념 때문이었다.

 


다만 당시의 미국은 한국의 공업화 지원에 소극적이었다.

미국 대통령 린든 존슨(케네디는 1963년에 암살당함)은 한국이 공업화를 이룩하면 전쟁을 일으킬지도 모른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60년대초가 쿠바 미사일 위기 등으로 미국과 소련의 신경전이 극에 달해 있었던 시기임을 감안하면

군인 출신 대통령인 박정희를 불안하게 여긴 것도 무리는 아니다.

 

 

 

 





박대통령이 생각해낸 방법은 바로 공산권과 대치하고 있는 처지가 비슷한 서독이었다.
1964년 박대통령은 서독을 방문하고 경제 발전에 대한 노하우를 전수받는다.

 

 

 




위 사진은 1964년, 박정희 대통령이 서독을 방문했던 모습이다.

세계 최 극빈국의 지도자, 왜소한 체구에도 불구하고 저 몸과 눈빛에서 쏟아져 나오는 강단을 보라.


당시 서독의 루트비히 에르하르트(Ludwig Erhard) 총리는 박정희 대통령에게

"지금은 냉전시대이며 2차세계대전의 논리에 사로잡히면 안된다"고 조언을 해주었다.
그 말이 박정희 대통령에게 영감을 준 것이다.

 

 

 

루트비히 에르하르트(Ludwig Erhard) 총리





이후 박정희 대통령은 전국민의 반발을 부를 정책을 추진한다. 바로 한일국교 정상화이다.
일본을 무조건 악으로 보는 일에 익숙했던 한국인들은 발광했다.

당시 학생이던 이명박도 시위를 했을 정도이니 얼마나 한국인들이 일본을 멀리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박대통령은 세계의 정세를 읽고 있었다.

미국이 뜨듯미지근하게 나오는 상황에서 일본 이외에는 매달릴 데가 없었던 것이다.

 


2차세계대전은 끝났다. 이제는 냉전시대이다. 냉전시대에서 제일 무서운 적은 소련, 중공, 북한이지 일본이 아니었다.
한일국교 정상화야말로 대한민국 현대사의 신의 한 수 였다.

어제의 원수가 오늘의 동지가 될 수 있다는 어마어마한 발상의 전환이었던 것이다.

 

 

 

당시에도 조선인들은 세계정세에 무지하고 감정이 앞선 무리라 할 수 있었다. 경향신문




한일국교 정상화는 그야말로 '신의 한 수' 였다.
그리고 일본으로부터 그토록 기다리던 외자가 들어왔다.
이 자금을 바탕으로 박대통령은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준비할 수 있었고,

우리가 한강의 기적이라 부르는 박대통령의 쾌거는 이 2차 경제개발 계획부터이다.

 


대부분의 후진국 지도자들은 외자를 도입해오하면 상당 부분을 자신이 착복한다.

하지만 박대통령은 정말 힘겹게 돈을 구해왔고 그 돈을 오로지 경제개발에만 썼다.

 

일부 병신들이 한국에서 누가 대통령이 되었든 경제발전은 이룰 수 있었다고 아가리 놀리는데

정말 그런 새끼들 보면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결코 없다.

 

 

 





한국 현대사도 모르는 반일 정신병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일본이 좋으면 한국을 떠나서 일본으로 가라고.
한국의 경제발전은 한일국교 정상화가 없었더라면, 그리고 일본이 자본을 대주지 않았더라면 불가능했다.
그리고 일본 기업들과의 기술 교류가 없었더라면 한국 기업들은 결코 지금처럼 세계에서 경쟁할 수 없었다.
오징어만 팔다가 중화학공업을 할 수 있었을 거 같냐? 라고 물어도 김대중이라도 할 수 있었다는 헛소리 뿐이니.

 

 

 

재미있다. 역사를 제일 잘 잊는 민족이다.



반일시위 중이라도 일본행 관광 비행기는 만석,

일본산 원자재는 필요없어도 스마트폰, 카메라는 사용.

일본산 게임기, 전자기기 중고거래는 반일 불매와 무관하다는 조속들.

 

일본이 100년의 적이라면 중국은 1000년을 넘게 우리민족을 수탈하고 착취하였으나

아무 소리 못하는 이른바 '대한민국' 사람들.

 

이해할 수도, 이해를 하고 싶은 노력조차 들이기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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