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하는 북한 주민들

 

 

 

나의 탈북동기 

나는 2003년 2월 달에 북한을 탈출하여 중국에서 근 2년이 넘도록 도피생활을 하다가 2005년 가을에 남한에 입국한 북한인민군 제대군인 출신이다. 북한에서 내가 살던 고향은 함경북도 무산시내였고 나는 군대에서 처벌 제대된 후 도시건설사업소에 배치 받아 평범한 노동자 생활을 하였다. 나의 아버님은 1996년 9월, 북한의 전 지역에서 식량난이 한창일 때 폐결핵과 함께 기근으로 인한 영향실조가 겹치면서 반년동안 매일 피를 토하면서 고생하시다가 불쌍하게 돌아가셨고 지금은 형님 내외분이 늙으신 어머님을 모시고 하루하루 생계를 유지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내가 북한을 탈출하게 된 경위는 배고픔이 정확한 이유라고도 할 수 있지만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그 배고픔을 이겨보려고, 하지 말아야 할 짓을 목숨을 걸고 필사적으로 하다가 우발적으로 사고를 저지른 것이 탈북을 결심하게 된 기본 동기라고 할 수 있다. . .

나의 부대는 공병국 27건설여단

내가 북한에서 군사복무를 한 부대는 공병국 산하 27건설여단이다. 북한에서 건설여단이라 하면 인민군대 중에서도 제일 수준이 낮은 부대로 취급되고 일 년에 총 한방도 제대로 쏴보지 못하는 부대라고 정평이 나있다. 그만큼 정규군의 특징을 갖고 전쟁을 대비해서 훈련을 하는 부대가 아니라 군복을 입고 총은 들고 있지만 국가적으로 제기되는 특수한 건설대상들을 전문적으로 담당하는 부대이기 때문이다. 이 부대들이 기본적으로 담당하는 건설대상들은 김일성, 김정일과 연결되어 있는 혁명 사적지를 만든다든가 별장과 도로를 만드는 일, 남조선으로 내려오는 땅굴을 파는 일, 외부에 노출되지 않는 지하 군수공장을 만드는 일 등 일반 사회부문 건설 자들이 맡을 수 없는 일들이다. 내 자신이 복무한 부대이기 때문에 말하기가 좀 멋쩍은데도 있지만 건설부대에 오는 사람들은 대부분 다 계급적으로 토대가 안 좋거나 부모가 과오가 있고 사회적으로 별로 대우를 받지 못하는 대상들이 걸러져서 오는 부대라고 생각하면 간단하다. . . 건설부대의 특징은 신병훈련을 한 달반을 받고나서 부대에 배치 받은 다음부터는 아침에 두 시간 정치상학을 제외하고는 매일과 같이 건설현장에 나가서 막노동을 하는 것이 하루도 빠짐없이 정해진 일과이다. 건설부대라는 말을 많이 듣고 또 어떤 부대라는 것을 미리 알고 왔지만 정작 군복을 입고 부대에 입대해서 직접 체험을 해보니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노동 강도가 너무나도 센 부대였고 깡패조직과 대비해도 조금도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할 수 있는 천하에 무질서 하고 법이 없는 무지막지한 부대였다. 

북한에서 건설 부대들을 가리켜서 거지부대, 날라리 부대(빈껍데기만 가지고 있는 부대라는 뜻)라고 멸시하고 비웃는 이유가 나름대로 있었다. 북한에서는 군대에 갔다 오면 사람이 돼서 온다고 믿는 것이 일반적인 흐름이고 또한 어떤 경우에는 풍습처럼 되어있다. 그러나 내가 복무한 공병 국 산하 건설여단은 그와는 정 반대이다. 건설 부대들은 사람을 만들어 주는 부대가 아니라 패싸움을 가리키고 도적질을 배워주며 사회 여성들을 강간하는 하는 등 군율이라는 것은 찾아볼 내야 찾아 볼 수가 없고 나쁜 것 중에도 가장 더럽고 나쁜 것만 골라서 “교육”하고 양성시키는 지저분한 부대라고 말할 수 있다. 한마디로 말하면 건설부대는 도적놈 집단이요, 강간과 패싸움을 전문으로 하는 부대라고 할 수 있다. 역대로 부대자체의 환경이 그렇기 때문에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건설부대에 들어오게 되면 자연적으로 그 흐름을 따라서 사람들이 점차적으로 타락하고 망가지게 되는 것이 어떻게 보면 순리적인 일이다. . .남한에서는 상상조차도 할 수 없는 일이겠지만 북한에서 부대와 부대끼리 싸워서 서로의 힘을 자랑하고 과시하는 하는 것은 어디에서나 흔하게 볼 수 있는 보통 일반적인 일이다. . . 대체로 건설하는 부대가 아니라면 다른 수단을 쓰지 않고 기술적으로 싸움을 하는 것이 상식적인 일인데 공병국산하의 건설 부대들은 쟁기(몽둥이나 곡괭이, 혹은 삽 같은 대용 수단들)를 들고 상대를 공격해서 치명상을 입히는 것이 특징이다. 내가 무엇 때문에 건설 부대들의 싸움하는 방법에 대해서까지 지루하게 설명하는지 아래에 내려가면서 독자들은 이해하게 될 것이다. . .

열차 칸에서 잘 못 만난 대남 공작원

지금도 기억에 생생한 1982년 7월 중순경에 우리 부대는 평양 501호 공사(인민무력부 지하갱도 확장공사)를 끝마치고 자강도 전천군 고인 구에 위치해 있는 산골짜기에 미사일 발사 기지를 만드는데 대한 공병국의 명령을 받고 전 여단이 그곳으로 이동하였다. 일본에서 조총련을 통해서 사들여온 비싼 건설장비들은 화물열차편을 이용해서 먼저 현장에 도착했고 인원들은 대대, 중대별로 나뉘어서 일반열차를 이용하여 현장으로 이동하였다. 자강도 전천군 고인구에 있는 그 골짜기에는 원래 한 개의 협동농장이 있었는데 미사일 기지가 건설되는 바람에 그곳에 있던 백여 가구의 농장 사람들은 하룻밤 새에 모두 타지방으로 강제 이주되고 농장 원들이 살던 주택은 모두 부대의 병실이 되어버렸다. 우리소대는 501호 공사가 끝난 후에도 뒷정리를 하느라고 평양에 남아 있다가 여단이 철수한지 3개월 뒤인 1982년 10월 말에 평양에서 만포 행 열차에 올라 자강도 전천군 고인구에 있는 미사일 건설 기지로 향했다. 많은 탈북자들이 남한에 와서 증언한 말들이 있기 때문에 남쪽에서도 대부분 알고 있겠지만 북한은 유리를 도적질 해가는 것이 많기 때문에 사람을 실어 나르는 열차들이라고 해봐도 창문에 유리창이 온전히 끼워져 있는 열차를 별로 볼 수가 없다. 매 열차마다 상급차 칸이 하나씩 붙어 다니는데 상급차 칸이라 해봐야 일반 칸과 별로 다를 바 없고 자리가 좀 편하다고 할 뿐이지 승객들이 비닐로 창문을 가리고 다니는 형편은 똑같았다. 상급 차간에는 영웅들이나 공로자, 좌급(한국의 영관급) 이상의 고급군관들과 보위부, 안전부계통의 사람들을 비롯해서 특별한 신분을 가진 사람들만 이용하는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국가적으로 정해진 이러한 공간도 폭력을 행사하는 무지막지한 군인들 앞에서는 무용지물이 되고 신분의 차이나 격 같은 것이 따로 없이 무조건 같이 공유해야 될 대상이다. 평양을 출발하면서 우리가 올랐던 열차는 일반열차였는데 보따리를 이고 진 사람들이 너무 많이 빼곡히 들어차서 한걸음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공간이 없어서 도저히 움직일 수가 없게 되자 소대장은 열차가 서는 다음 정거장에 소대가 모두 내려서 상급열차에 오르라고 지시하였다. 우리 소대는 열차가 다음 정거장에 멈춰 서자 모두 창문으로 뛰어 내려서 앞쪽에 있는 상급 차간으로 달려갔다. 상급차간으로 달려가서 문을 열라고 소리치자 안에서 안내원들이 문을 안으로 닫아걸고 열어주지를 않았다. 기차가 떠나겠다고 빽 빽 대고 신호를 울리자 다급해진 소대장은 출입문을 포기하고 모두 창문을 오르라고 지시하였다. 우리는 일시에 창문 쪽으로 달려가서 창문을 가리고 있던 비닐들과 군데군데 몇 장씩 남아 있는 유리창들을 부수고 열차 안으로 기어들어갔다. 많지 않은 사람들이 타고 있어서 비교적 조용하던 상급 차안에 한 개 소대의 인원들이 갑자기 쏟아져 들어가자 열차 않은 수라장이 되었다. 소대장은 열차가 출발하자 문을 닫아걸고 열지 않은 사람이 누구냐고 열차 안에 있던 사람들에게 소리쳤다. 어느 누구도 대답이 없자 소대장은 열차 안에 타고 있는 여성 열차 안내원들을 모조리 끌어오라고 소리쳤다.

대원들이 여성 안내원 세 명의 머리채를 잡아서 소대장 앞에다가 끌어다 놓자 소대장은 그 자리에서 한 여성의 옷깃을 잡고 힘껏 잡아 당겼다. 안내원이 입고 있던 옷은 단추가 우두둑 떨어져 나갔고 속옷까지 함께 찢어지면서 그의 몸은 숱한 승객들이 보는 앞에서 홀딱 벗겨져 아무것도 가리지 않은 채로 알몸이 훤하게 드러났다. “이 쌍 놈의 기집 애들 죽고 싶어? 야 이 새끼들 뭐해. 저 두 년의 간나 기집 애들 옷도 모조리 벗기고 밟아 버려” 워낙 성질이 지랄같이 고약한데다가 약이 오르고 기분이 상할 때로 상한 소대장이 소대원들한테 불호령을 내렸다. 소대원들은 숱한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여성안내원들의 속옷을 팬티도 남기지 않고 모조리 벗겨놓고 짐승 다루듯이 이리 굴리고 저리 굴리고 희희덕거리면서 조롱하고 장난감 취급을 하였다. 법은 멀리 있고 주먹이 가까이 있는 북한세상이라고 하지만 내가 보기에도 그야 말로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참혹한 광경이 아닐 수가 없었다.

옷이 홀딱 벗겨진 여성안내원들은 수치심과 수모에 울고불고 콧물 눈물 다 떨 구면서 제발 잘못했노라고 한번만 용서해 달라고 소대장의 발 앞에 엎드려서 빌고 또 빌었다. 바로 그때 대좌(대령)의 군사 칭호를 달고 있는 한 군관이 그 광경을 지켜보다가 참지 못하겠던지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그의 나이는 대충 어림짐작으로 보아도 한 50대 중반 이상은 되어보였다. 그는 오자마자 계급이 높은 지휘관답게 자세를 취하더니 소대장에게 어느 부대냐고 증명서를 내놓으라고 하였다. 북한에서 공병국 이라고 하면 당시는 무력 부 산하의 부대들처럼 빨간 연장이 아니라 파란 연장을 달고 있었기 때문에 그도 아마 우리가 공병국 산하 날라리 부대라는 것은 짐작하고 온 느낌이었다. 소대장은 대좌를 쏘아보다가 상급에 대한 예의 같은 것은 아예 무시해 버린 채 도적이 매를 드는 격으로 그에게 도리어 시비를 걸었다. “아무 부대면 어때서. 이건 어디서 굴러온 개뼈다귀 같은 영감태기야. 너도 여기서 옷을 좀 벗구 싶어? 우리가 공병 국 이라고 얕보는 모양인데 대좌를 달고 다니면 누가 엎드려서 구두라도 닦아 줄줄 알았어?”

대좌라면 까마득한 하늘과도 같은 상급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옆에서 듣기에도 소대장이 하는 말이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었다. . .상하좌우를 분별하지 못하고 다른 부대의 상급지휘관들의 인격을 무시하고 놀려대다가 잘못 걸려들어서 공개처형을 당한 사람들도 있는데 그 순간에 소대장은 아마 그런 사실을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있는 것 같아 보였다. 소대장을 바라보는 대좌의 인상이 한순간에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소위 너 공병 국 어디 소속이야. 이놈의 자식 너한테는 상급도 없어? 너 콩밥 좀 제대로 먹어볼래?” . . 대좌는 비록 혼자였지만 계급이 있는지라 그의 기세도 만만치 않았다. 대좌가 자기 앞에서 공손하게 수그러들 줄 알고 위협을 주었는데 잘 먹혀들지 않자 소대장이 주먹으로 그의 턱을 일시에 가격했다. 순간적으로 날아온 주먹에 몸을 가누지 못하고 휘청거리는 대좌에게 주위에 있던 소대 병사들이 벌떼처럼 달려들어서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참으로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 패륜적이고 군법을 무시하는 일이 달리는 열차 안에서 발생했다. 바로 그 순간에 좌중을 놀라게 하는 또 하나의 광경이 순식간에 벌어졌다. “이 불한당 같은 새끼들 당장 멈추지 못해?”

벼락같은 소리가 들리더니 몸이 탄탄하고 다부지게 생긴 30대 초반의 한 사람이 싸움판의 한가운데로 날렵하게 뛰어들었다. 그는 험악한 기세로 대좌를 구타하는 소대원들을 둘러보더니 가벼운 동작으로 주위에 있는 열댓 명의 인원들을 손쉽게 제압해 버렸다. 그 사람이 소대병사들을 때리는 동작이 얼마나 민첩하게 빠르고 정확하였던지 나는 가까운 거리에서 지켜보면서도 그의 손발이 움직이는 것을 도저히 눈으로는 읽을 수가 없었다. 기세등등해서 대좌를 짓밟던 소대병사들이 순식간에 영문도 알 수 없는 사람한테 얻어맞고 열차바닥에 모두 쓰러지자 소대장의 몸이 일시에 굳어졌다. 혼자서 열다섯 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순식간에 제압한다는 것은 영화에서나 본 일이었지 현실에서는 소대장으로써도 처음 보는 너무나도 신기하고 놀라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싸움에 가담하지 않고 옆에 서있던 나에게 안내원들의 옷을 입혀주라고 말하더니 쓰러져서 매를 맞던 대좌를 자기가 직접 일으켜 세우고 밟혀서 피가 나오는 그의 입술을 자기가 직접 닦아 주었다. 그는 소대장을 대좌의 앞에 불러다가 세워놓고 무섭게 호령하였다. “너한테 단단히 버릇을 가르쳐 주고 싶었지만 대원들이 보는 앞에서 지휘관을 망신시키는 일은 잘된 일이 아니기 때문에 너 하나만은 용서해 준다. 그 대신 대좌 동지하고 처녀 안내원들에게 제발 잘못했다고 무릎을 꿇고 빌어라” 갑자기 당하는 일이라 소대장이 우물쭈물하자 그는 발로 소대장의 종아리 아래 복사뼈 부위를 순식간에 바로 가격해서 대좌 앞에 주저 안쳤다. 소대장은 상대방의 위엄 앞에 파랗게 질려가지고 대원들이 보는 앞에서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기가 짐승 다루듯 하던 대좌와 처녀 안내원들에게 잘못했으니까 용서해 달라고 빌었다. . . 나는 사람을 때리는 광경을 보면서 저 사람은 사복차림(민간인 복장)을 하고 다니지만 대남연락소 공작원이 아니면 어느 특수부대에서 한 가닥 하는 사람이 분명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소대장이 빌고 난 후에 그는 자기한테 맞아서 쓰러진 소대사람들을 한사람씩 일으켜 세우더니 몇 마디 훈시 겸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였다. 싸움을 할 때는 호랑이 보다 더 기세가 무서운 사람이었는데 정작 나중에 행동이나 말하는 것을 보니 정말로 자상하고 사내다운 사람이었다. 그는 주머니에서 여과담배(한국의 일반 필터담배를 북한에서는 담배연기를 여과시킨다고 하여 여과담배 혹은 고급담배라고 부름)를 한 갑 꺼내서 매 사람들에게 일일이 한 대씩 나누어 주면서 자기도 어린 나이에 부모 곁을 떠나서 고생을 많이 한 사람이고 오랜만에 부모님들이 계시는 고향에 가는 길이라고 소개를 하였다.

우리의 일행 중에서 금방 입대한 어린 대원(덕영이)이 집이 어딘 가고 묻자 그는 자강도 희천시 인근에 있는 농촌이라고 대답을 하였다. 서로 이런 말 저런 말을 주고받으면서도 그는 자기의 내력을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을 피했지만 나는 내가 생각했던 대로 그가 범상치 않은 사람이라는 것을 느낌으로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자강도 희천은 우리가 가는 목적지인 자강도 전천군 고인구보다 조금 가깝기 때문에 그는 어차피 우리보다 먼저 열차에서 내리게 되어있었다. 열차에서 내리기 전에 그는 우리에게 3일 후에 고향에 계시는 어머님의 진갑 잔치라고 알려주면서 시간이 있으면 다 같이 놀러오라고 고향집주소를 적어서 집이 어디냐고 묻던 어린 대원 덕영이에게 넘겨주었다. 우리의 첫 만남은 불미스럽게 잘 못 시작되었지만 그와 헤어지기까지의 과정 속에서 나는 참으로 그가 인정이 있고 사내다운 기질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 . 

중대를 자살로 내몬 대대장의 실수

그 사람과 헤어져서 우리는 그 유명한 개고개를 넘어서 한 30분가량을 더 가서 저녁 무렵에야 목적지인 자강도 전천군 고인 역에 도착하였다. . . 기차역에서 25분정도를 걸어서 대대가 위치해 있는 장소에 도착했고 소대장은 소대를 정렬시킨 후 바로 대대 지휘부에 들어가서 대대장에게 소대의 도착보고를 하였다. 보고를 받고 소대의 인원점검을 하러 나왔던 대대장은 소대인원 절반이 맞아서 터지고 찢어진 모습을 보더니 단번에 눈살이 꼿꼿해 졌다. 그렇지 않아도 성격이 괴벽하고 맞고는 절대로 참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전 여단 적으로 소문이 나있는 대대장이었다. “소대장, 네 얼굴은 반반한데 대원들은 어떻게 돼서 저렇게 절반 이상이 피투성이가 된 거야. 무슨 일이야?” 대대장이 소대장을 쏘아보면서 벼락같이 소리를 질렀다. 소대장이 머뭇거리자 대대장이 소대장을 향해서 삿대질을 하면서 대대지휘부가 떠나갈듯이 다시 한 번 소리쳤다. “야 이 새끼야 어떻게 된 일이냐고 지금 너한테 묻고 있잖아. 귀때기가 갑자기 막혀버렸어?”

한 두 사람도 아니고 소대의 절반이 넘는 병사들의 얼굴이 맞아서 붓고 찢어지고 했으니 지휘관인 대대장으로써는 얼마든지 화가 날만도 한 일이였다. 소대장은 열차 안에서 있었던 일들을 대대장 앞에서 상세하게 설명하지 않고 자기불찰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고 간단하게 설명하였다. 대대장은 말없이 한참동안 소대장을 노려보더니 더 이상 캐묻지 않고 대원들을 휴식시키고 소대장은 지휘부로 오라고 말하고는 들어가 버렸다. 대대장한테 불려 들어가서 한 시간 이상 곤욕을 치르고 나온 소대장은 병실에 와서도 말 한마디 없이 주눅이 든 기색이었다. . . 이튿날 아침 식사이후 정치상학이 끝나고 오전 10시 반 정도가 돼서 우리 중대는 대대장의 지휘아래 백 여 명이 두 대의 우와즈(소련에서 들여온 트럭)에 나뉘어 타고 벌목장소로 향했다. 2-30분정도면 벌목장에 충분히 도착할 수 있는 시간인데 중대를 태운 두 대의 트럭은 벌목장을 지나고 개고개를 그냥 넘어서 남쪽 방향인 희천 쪽으로 계속 질주해서 내려갔다. . . 우리를 태운 트럭이 마을 입구에 들어설 무렵 내 옆에 서있던 덕영(고인으로 올 때 열차 안에서 대남공작원으로부터 집주소를 넘겨받은 신입병사)이가 나에게 조용히 속삭였다. “하사 동지 우리가 지금 그 사람한테 가는 게 아닐까요?” “우리가 오던 날 저녁에 소대장동지가 나한테 와서 그 사람이 열차 간에서 나에게 준 집주소를 달라고 해서 줬습니다. 대대장 동지가 가져오라고 시켰나 봅니다.” 덕영이의 말을 듣고 그 제서야 나도 중대가 왜서 벌목장으로 가지 않고 이곳으로 남하했는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중대를 태운 두 대의 트럭은 자그마한 농촌마을 한가운데서 멈춰 섰다.

80대 1의 대결

트럭이 마을 한복판에 도착하자 대대장은 중대장 이하 전체 중대를 집합시키고 기세가 등등해서 훈령을 내렸다. “1중대 2소대가 3일전에 평양에서 오는 열차 안에서 한 놈한테 당한 수모를 오늘 반드시 갚아야 돼. 그 새끼가 아무리 날고 겨도 걔는 혼자고 우리는 80명이야. 죽이지는 말고 다시는 까불지 못하게 완전히 병신을 만들어 버려. 모두 정신 차리고 알아들었어?” 대대장의 표정은 그날따라 여느 때는 쉽게 볼 수 없었을 정도로 무척 일그러지고 엄청나게 살벌해 보였다. . . 대대장의 말이 떨어지기가 바쁘게 여기저기서 “죽이자. 죽이자”하는 목소리들이 연발로 터져 나왔다. 지나가던 마을 사람들은 군인들 한 개 중대가 갑자기 마을에 들이닥쳐서 도끼와 톱을 들고 흔들어 대면서 소란을 피우는 것을 보자 무슨 영문인지 몰라서 먼발치에서 겁먹은 눈길로 바라보면서 자기들끼리 수군거렸다. . . 벌써 미리 그 사람의 집을 파악하고 있었는지 대대장이 중대장과 소대장들을 거느리고 먼발치에서 앞장서서 중대를 인솔해가고 있었다. . .중대가 우르르 몰려가는 속에서도 소대장은 다른 지휘관들이 눈치를 채지 못하게 우리들에게 싸움에 끼지 말라고 눈짓을 하였다. 나는 그의 집 앞에 이르는 동안 중대의 맨 뒤에서 내키지 않는 걸음으로 따라가면서 죄인과도 같은 무거운 마음을 도저히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북한의 농촌들 어디를 찾아가 봐도 다 그러하듯이 그의 집도 조금도 다를 바 없는 평범하고 아담한 농촌의 문화주택(북한정권에서 농촌들마다 일률적으로 무상으로 지어주는 집을 문화주택이라고 부름)이었다. 우리가 집 앞에 도착하자 집안과 마당에서는 그가 열차에서 우리에게 알려주던 것처럼 정말로 칠갑잔치가 한창이었다. 북한의 농촌마을들에서는 식량난이 터지기 전까지는 어느 집에 잔치가 생기면 아이고 어른이고 할 것 없이 동내사람들 모두가 몰려가서 밤새도록 같이 마시고 즐기는 풍습이 있었다. 고향집의 풍경과도 같은 소박한 칠순잔치가 무뢰한들에 의해서 싸움마당으로 변한다고 생각하니까 참으로 마음이 아프고 떨렸다. 잔치를 한창 즐기던 마을 사람들은 군인들이 떼거리로 우르르 몰려오자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이라고 예감했던지 모두가 당황해 하는 기색들이었다. 대대장은 중대를 집 앞에 멈춰 세우고 안에다 대고 소리쳤다. “이 집주인이 누군지 밖으로 나와. 우리가 미리 알고 왔으니까 숨을 생각하지 말고 3일전에 평양에서 온 새끼 당장 나와”

떠들썩하던 잔치집의 분위기가 대대장의 고함소리 한 번에 순식간에 조용해지고 얼어붙었다. 밖에서 술을 마시던 몇 사람들이 집안으로 다급히 뛰어 들어가는 것이 보였고 아마도 바깥의 상황을 안에다가 알리는 뜻한 눈치였다. 잠시 후에 한복을 깨끗하게 차려입은 늙은 할머니 한분이 집안에서 나오더니 공손한 말투로 대대장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당신의 아들인가 하는 사람 3일전에 평양에서 왔지? 집안 박살이 나지 않겠으면 그 새끼 당장 나오라고 해” 대대장은 앞에 서있는 부모 벌 같은 할머니에게 인사도 없이 첫마디부터 마구잡이식으로 반말을 쏟아냈다. 대대장의 행동은 그야 말로 천륜을 무시하는 무뢰한의 행동이었고 북한 군인들한테서 늘 보이는 망나니의 행동 그대로였다. . . “내 아들이 집 떠 난지 27년 만에 온 게 있어요. 무슨 일인지 나한테 먼저 알려주면 안 되겠나요?” 할머니는 그래도 공손한 눈길로 대대장을 바라보면서 말을 건넸다. 이때 옆에 있던 중대장이 나서서 할머니에게 소리쳤다. “다 죽어가는 송장 같은 노친은 필요가 없으니까 방안에 숨어있는 아들새끼 뒤지기 전에 빨리 밖으로 나오게 하란 말이야” 이때 60이 넘어 보이는 남자 한 분이 대대장 앞으로 오더니 머리를 숙여서 인사를 하고는 할머니를 가리키면서 자기의 누님인데 오늘 진갑잔치를 하는데 지금 한창 상을 받고 있는 중이라고 설명했다. 중대장이 동생이라는 그 사람의 목덜미를 잡고서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야 이 새끼야 너도 죽고 싶어서 환장을 했어? 상을 받던 똥을 받던 우리가 상관할 바가 아니니까 평양에서 온 그 새끼를 당장 내보내란 말이야. 집안으로 쳐들어가서 다 박살을 내야 정신을 차리겠어?”

중대장한테 목덜미를 잡힌 60이 넘은 동생 분은 얼굴이 파랗게 질려서 부들부들 떨면서도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조카가 잘못한 것이 있으면 대신 사과를 할 테니 한번만 용서해 달라고 애걸하였다. 중대장의 주먹이 한순간에 그의 얼굴에 날아들었고 정면을 얻어맞은 그 사람은 코피가 터지면서 그 자리에 쓰러졌다. 이를 지켜보던 할머니가 참지 못하고 중대장의 따귀를 후려갈겼다. “야 짐승만도 못한 놈들아 네놈들이 인민군대가 맞긴 맞어? 차라리 날 죽여라 천하에 개만도 못한 놈들아” 칠순의 늙은 할머니는 독이 올라서 중대장의 한쪽 귀를 잡고 매달리 듯 달려들면서 사정없이 비틀었다. 중대장이 자기의 귀를 잡고 있는 할머니의 손을 뿌리치면서 가슴을 밀치자 할머니도 애처로운 비명소리를 지르면서 저만치 나가서 쓰러졌다. 바로 그 순간에 열차 간에서 보았던 벼락같은 일이 일어났다. 할머니가 쓰러지기가 바쁘게 어디서 나타났는지 “평양에서 내려온 손님”이 허공으로 날라 와서 빠른 발로 중대장의 경동맥을 가격했다. 중대장을 한 번의 발 타격으로 가볍게 쓰러뜨린 “평양손님”은 감히 마주보기 힘들 정도의 매서운 눈길로 대대장 앞에 서서 그를 쏘아보았다. “내가 평양에서 3일전에 내려온 사람이고 27년 만에 고향을 찾아 온 아들입니다. 나한테 볼일이 있습니까?” 당사자가 나타나서 순식간에 한방으로 중대장을 기절시켜 버리자 대대장도 그의 위압적인 기세에 눌렸던지 조금 전에 소리치던 모습과는 많이 다르게 순간적으로 자세가 굳어지는 뜻한 눈치였다. 그러나 대대장은 한 개 중대라는 수적 우세가 있다는 것을 믿었는지 이내 자기를 수습하고 거드름을 피우면서 도발적으로 나왔다. “내가 대대장이다. 네가 열차 안에서 우리 사람들을 때린 애냐?” “때린 것이 아니라 숱한 사람들 앞에서 행동을 너무 무리하게 하는 것 같아서 버릇을 가르쳐 줬을 뿐입니다. 내가 잘못한 일이라도 있습니까?” “잘못한 정도가 아니라 인민군대를 때렸잖아 이 새끼야”

대대장은 눈알을 부라리면서 그의 얼굴에 대고 삿대질을 해댔다. “그럼 대대장은 인민군대가 백주 대낮에 열차 안에서 상관을 구타하고 여성안내원들을 발가벗기는 것이 정당하고 옳은 일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평양손님”의 행동이나 말투는 비교적 겸손하고 양보할 줄 아는 성품이었고 누가 봐도 한눈에 품위나 예의가 돋보일 정도로 단정해 보였다. 이때 소대장이 신경전을 벌리고 있는 그들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면서 대대장한테 열차 안에서 있었던 일은 전적으로 소대장인 자기가 잘못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고 설명을 하자 대대장이 단박에 그이 면상을 후려갈기면서 고함을 내질렀다. “병신 같은 새끼 대원들을 만신창이 되도록 맞아터지게 만들어 놓고 무슨 할 말이 있다고 끼어들어. 저리 비키지 못해?” 화해를 시키려고 끼어들었다가 생각지 않게 한방 얻어맞은 소대장은 두말 다시 붙이지 못하고 뒤로 밀려났다. . . “대대장 동무, 내용을 어떻게 알고 여기까지 오셨는지 모르겠지만 우리가 열차 안에서 잠깐 동안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서로 화해하고 다 풀었습니다. 대원들을 생각하는 그 마음은 저도 이해가 갑니다. 서로 복잡하게 일을 만들지 말고 좋게 해결하는 것이 내가 보기에도 좋을 것 같습니다. 이쯤에서 화를 푸시고 들어가서 술이나 한잔 하십시다” 

“평양손님”은 한 발짝 양보하면서 대대장에게 깍듯이 양해를 구했다. 상황을 더 악화시키지 말고 이쯤에서 그만두었으면 하는 생각이었는데 “평양손님”이 수그러드는 행동을 보이자 대대장은 오히려 더 기승을 부리면서 지휘관의 품위라고는 찾아볼 수 없이 거칠게 나왔다. “야 평양, 너 금방 몸을 놀리는 거 보니까 어디서 몇 동작 좀 배운 것 같던데 한번 움직여 보지. 우리가 얼마든지 받아줄게. 우리가 여기까지 왔다가 그냥 돌아갈 거라고 생각해? 이 거지같은 새끼야” “대대장 동무 내가 양해를 구했습니다. 병사들한테 손을 댄 것은 제 실수였습니다. 잘못은 무조건 내가 했으니까 여기서 그만하고 서로 화해를 합시다.” 대대장이 자존심을 건드리는 말투를 던졌지만 “평양손님”은 이번에도 얼굴 모습 하나 달리하지 않고 친절하게 화해를 요청했다. “평양손님”이 매번 겸손한 자세로 나오자 중대병사들 속에서도 웅성거리면서 그를 동정하는 눈치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예상외로 “평양손님”이 자기보다 한수 위의 태도로 나오는데다가 중대병사들까지 수군거리면서 한풀 죽는 분위기로 바뀌어 가자 대대장의 태도가 돌발적으로 변하였다. 일이 자기의 의도대로 쉽게 되어가지 않자 자존심에 상처를 받은 것이었다. “이 평양새끼 죽여 버려” 대대장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도끼와 톱을 든 병사들이 순식간에 “평양손님”의 주위를 에워쌌다. 일이 그쯤 벌어지자 “평양손님”도 더는 양보할 생각이 없는지 단호하게 대대장을 향해서 마지막 경고를 하였다. “대대장, 병사들이 다치는데 대해서 나중에 후회를 하지 마시오. 책임은 반드시 당신이 진다는 것을 명심하시오”

바로 그때 집이 함흥 쪽인 나이 먹은 구대원 한명이 나무를 하려고 시퍼렇게 날을 세운 낫을 들고 “평양손님”의 뒤에서 달려들었다. 일어나지 말아야 할 싸움은 가슴을 졸이던 끝에 드디어 터지고 말았다. 먼저 “평양손님”을 향해 달려든 구대원(북한에서는 입대년도가 오래되고 군사복무를 많이 한 사람들을 통상적으로 구대원이라고 부름)은 아무 때 봐도 사리를 판단하지 못하고 모험심이 많은 사람이었으며 싸움판에서는 물불을 가리지 않고 늘 앞장에 서던 사람이었다. 그가 휘두른 시퍼런 낫은 그대로 “평양손님”의 등에 박혔고 등가죽을 한 뽐 정도나 끔찍하게 찢어 놓았다. 섣불리 달려들지 못할 것이라고 타산하고 한 순간 방심했던 “평양손님”이 어처구니없게 먼저 일격을 당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 정도의 사건은 첫 순간에 “평양손님”의 실수로 경미하게 일어난 일이었을 뿐 결국 우리는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뽑는 것과 같은 하지 말았어야 할 무분별한 실수를 범하고 말았다. 드디어 자신이 먼저 공격을 받았다고 생각했었는지 “평양사람”은 자신에게 낮을 휘두른 함흥에서 입대한 구대원을 한순간 노려보더니 순식간에 낫을 들고 있는 그의 오른손 을 잡아채면서 팔 굽을 완전히 뒤로 꺾어버렸다. 눈 한번 깜빡할 사이에 벌어진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시작에 불과한 일이었을 뿐이고 21명의 병사들이 “평양사람”에게 맞아 죽는 떼죽음이 일어난 것은 잠시 뒤의 일이었다. 팔 굽이 완전히 부러진 함흥의 구대원이 기절해서 나가자빠지자 흥분한 중대전체가 한사람을 향해서 일시에 달려들었다. . .

70여명이 도끼와 톱을 살벌하게 휘두르는 속에서도 “평양손님”은 적당히 힘 조절을 해가면서 공격은 하지 않고 방어를 위주로 상대방을 견제하였다. 중대장이 첫 타격에 쓰러지고 구대원 한명이 팔이 부러져 나가자 겁을 먹은 중대 병사들은 도끼와 톱은 들고 있어도 먼발치에서 위협만 할 뿐 섣불리 덤벼들지는 못했다. 진갑잔치에 놀러왔던 친척들과 동내사람들은 잔치집이 싸움판으로 번지자 아우성을 쳤고 농장 간부들은 대책을 세우려고 하는지 어디론가 급히 사방으로 달려가는 모습들이었다. 중대장한테 맞아서 쓰러졌던 “평양사람”의 어머니는 눈물범벅이 되어 이사람 저 사람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아들을 살려달라고 애원하였다. 잘못하면 칠순의 노인이 싸움판 한가운데서 다칠 것 같아서 소대장과 내가 대대장의 눈길을 피해서 어머니를 집안으로 모셔 들어갔다. 어머님은 소대장과 나의 손을 꼭 잡고 우리아들은 부모의 사랑을 모르고 자란 불쌍한 사람이라고 제발 싸움을 말려달라고 통사정을 하였다. 소대장과 내가 어머님께 싸움을 꼭 말리겠다고 말씀을 드리고 밖으로 나왔을 때 뜻밖의 광경이 벌어졌다. 누가 도끼를 던졌는지 “평양사람”이 주저앉아서 피범벅이 된 종아리를 두 손으로 조이고 있었고 그의 발치에는 도끼가 떨어져 있었다. 이때 3소대장이 달려들면서 숙이고 있던 그의 머리를 발로 내리 밟았다. 순간 “평양사람”의 입에서 괴성 같은 소리가 터져 나오더니 그의 주먹이 3소대장의 턱 아래 목젖 부위에 강하게 들어가 박혔다. 부질없이 달려들어서 발길질 하던 3소대장은 끽 소리 한마디도 못하고 그 자리에서 목뼈가 부러져서 단번에 즉사하고 말았다. 그때부터 “평양사자”는 자신을 주체할 수 없게 이성을 잃어버렸고 성난 한 마리의 사자를 방불케 할 정도로 사정없이 날뛰었다.

그의 발과 주먹은 사람이라고 믿기 힘들게 번개처럼 움직였고 그의 손발을 거쳐 간 사람들은 사방으로 나가떨어지면서 비명을 질렀다. 20분도 채 되지 않아서 30명이 넘게 쓰러지자 다급해진 대대장이 “더 달려들지 말고 피하라”고 다급히 고함을 질렀다. 그러나 성난 “평양의 사자”는 싸움을 멈추지 않았다. 처음의 시작과는 대조적으로 상상도 할 수 없게 순식간에 싸움판의 상황이 반전된 것이었다. 겁을 먹은 군인들이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지자 “평양사람”은 소외양간 쪽으로 피해 달아나는 대대장에게 달려가서 그의 뒷덜미를 움켜쥐고 대원들이 쓰러져 있는 마당 한가운데로 잡아다가 꿇어 앉혔다. 얼굴이 까맣게 죽어서 부들부들 떨고 있는 대대장에게 친척들과 마을사람들 수십 명이 달려들어서 몽둥이로 사정없이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도끼와 낫에 등과 다리에 깊은 상처를 입은 “평양사자”의 몸도 벌써 피범벅이 되어 옷이 다 젖어있었다. 우리는 오도가도 못 하고 먼발치에서 마을사람들의 몽둥이에 반죽음이 되도록 얻어맞고 있는 대대장을 그냥 지켜볼 수박에 없었다.

30분도 채 안 걸리는 싸움이었지만 그 후과는 너무도 심각하였다. 그래도 “평양사자”가 나서서 흥분한 마을 사람들을 말리고 피투성이가 되어서 땅바닥에 쓰러져 있는 대대장을 일으켜 세웠다. 당장 대대장을 한방에 죽이고 싶은 것이 그의 마음이었겠지만 그래도 그는 자신을 절제하고 남의 사정을 먼저 배려하였다. 대대장을 바라보는 “평양사자”의 눈빛은 여전히 날카로우면서도 동정인지 허탈함 때문인지 갈등으로 엇갈리고 있었다. 그는 한참동안 무엇인가 생각하는 뜻하더니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서 대대장의 얼굴에서 흐르는 피를 닦아 주었다. 옆에서 바라보는 사람들이 속이 뭉클하고 눈물이 나올 정도였다. “평양사자”는 먼발치에 서있는 우리를(열차 간에서 만났던 사람들)알아보더니 반가운 듯 눈웃음을 지으면서 가까이 오라고 손짓을 하였다. 미안한 모습으로 우리가 그의 앞으로 다가가자 “평양사자”는 피를 닦아 주던 손수건을 말없이 나의 손에 넘겨주면서 후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가 대대장을 부축해서 일으켜 세우고 옆에 쓰러져 있는 동료들을 도와주려고 하자 “평양사자”는 그러지 말라고 손짓을 하였다. “그 사람들은 이미 죽은 사람들이야. 내가 죽어도 하지 말았어야 할 싸움이었는데 실수한 것 같아. 사람들이 너무 많이 죽었잖아”

쓰러져 있는 사람들이 모두 죽었다는 말에 소대장을 비롯한 우리는 모두는 순간적으로 가슴이 덜커덩 내려않는 기분이었다. 급소 부위들을 얻어맞아서 잠시 동안 기절해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20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두 죽었다니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아찔한 일이었다. 싸움의 빌미를 제일먼저 제공한 주인공이라면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소대장은 풍을 만난 사람처럼 온몸을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이때 내가 용기를 내서 소대장을 대신해서 “평양사자”에게 말했다. “저 사람들이 다 죽었으면 이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가 잘못해서 일어난 일입니다. 처음부터 사실을 구체적으로 말하고 말렸더라면 이렇게까지는 되지 않았습니다. 우리 잘못이 큽니다. 죽어도 우리가 죽겠습니다.”. . “평양사자”는 나와 소대장을 비롯한 우리 일행들을 얼마동안 측은하게 바라보더니 대대장에게로 천천히 눈길을 돌렸다. “대대장, 이번 싸움은 잘못된 싸움이야. 내가 누군지 처음부터 자네들이 알아보지 못한 것이 실수였어. 내가 누구라고 신분을 정확히 밝히면 자네들은 반드시 놀라게 되어있어. 함부로 말할 수 없는 사정이 있어서 숨기고 있었는데 대대장 당신이 판단을 잘못했어. 숱한 사람들이 죽었으니 이제는 우리 둘 중에 한사람이 책임을 져야 될 일이야” 그의 목소리는 담담하게 들리면서도 안타까움이 그대로 배어 있었다. 

그 상황에서 물어볼 수도 없는 일이지만 우리는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는 공포감 보다는 그가 누구인지에 대해서 더 많이 궁금하였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는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까지 자기의 신분에 대해서 우리 앞에 밝히지 않고 안타깝게 세상을 떠나갔다. “평양사자”나 우리가 죽은 사람들의 처리문제를 두고 어떻게 해야 할지 결심을 내리지 못하고 망설이고 있는데 불시에 인근에 있는 교도지도국산하 특수부대 사람들 수 십 명이 싸움현장에 들이닥쳤다. 아마도 처음 싸움이 시작될 때 진갑잔치에 놀러왔던 농장의 간부들이 달려가서 이미 전부터 알고 지내던 그들에게 구원을 요청한 모양이었다. 그런데 이때 예견치 못했던 돌발적인 일이 순간적으로 발생하고 말았다. 싸움판을 피해서 숨어있던 중대의 하사관인 부분대장 한사람이 특수부대사람들이 오는 것을 우리를 도와주려고 오는 것으로 착각하고 긴장을 풀고 서있는 “평양사자”에게 달려들어 그의 등허리 척추를 도끼로 내리 찍었다. 말릴 새도 없이 눈 깜빡 할 사이에 일어난 청천병력과도 같은 일이였다. 부분대장은 척추에 박힌 도끼를 뽑더니 다시 한 번 그 자리를 내리 찍었다. 도끼날에 척추가 잘린 “평양사자”는 괴롭게 신음소리를 내더니 덩어리 같은 피를 토하면서 그 자리에 푹 고꾸라졌다. 소대장과 내가 달려들어서 도끼를 빼앗고 “평양사자”를 품에 안았을 때 그는 벌써 마지막 숨을 힘들게 몰아쉬고 있었다. 내가 울면서 죽지 말라고 소리치자 “평양사자”는 간신히 눈을 뜨더니 어머니를 부탁한다는 소리와 함께 “억울해”라는 말을 비교적 똑똑하게 남기더니 맥없이 머리를 떨 구어 버렸다. . 그러나 싸움의 후과는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21명의 사망자를 내고 부대로 돌아온 우리는 밤새도록 한잠도 못자고 지휘부에 불려가서 국에서 급파되어온 검사의 조사를 받아야 했다.

그 사람은 5.18광주의 영웅이었다

싸움이 끝난 바로 다음날, 전날에 있은 “평양사자”와의 80대1의 싸움에서 21명의 목숨을 잃은 대대에는 아침부터 긴장감이 돌았다. 중대와 대대뿐만이 아니라 전 여단에 돌아가는 공기가 초상집 분위기 이상으로 긴장하고 팽팽했다고 할 수 있었다. 국의 검찰에서 검사들이 내려오고 여단지휘부의 간부라고 하는 사람들도 전부가 다 대대로 몰려와서 사건의 경위를 조사하였다. 그날 오전 11시가 지나서 점심시간이 가까이 다가오는 시간이었다. 하늘 멀리에서 직승기(헬기)의 동음이 들려오더니 그 소리는 여단이 전개해 있는 골짜기의 상공 쪽으로 점점가까이 다가왔다. 모두가 불안한 눈길로 하늘을 주시하고 있는데 아니나 다를까 직승기는 고도를 낮추더니 농장에서 무를 심었던 대대 앞의 공터에 천천히 내려앉았다. 여단장, 정치위원을 비롯해서 여단에서 내려온 지휘관들이 손님들을 맞이하기 위해 착륙한 직승기 앞으로 달려 나가서 정렬하였다. 직승기의 문이 열리더니 검은색 선글라스를 끼고 까만 양복차림을 한 30대 중반의 여성이 먼저 내리고 그 뒤로 역시 사복을 하고 똑같이 검은색 선글라스를 낀 7-8명의 남자들이 뒤따라 내리었다.

그들은 부대지휘관들의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하더니 여단장의 안내를 받아 곧바로 대대지휘부 안으로 들어갔다. 그들이 대대지휘부로 들어 간지 채 15분도 되지 않아서 갑자기 전 여단의 폭풍명령을 알리는 신호나팔소리가 골짜기를 흔들어 놓았다. 각 대대, 중대들은 전투장구류들을 착용하고 여단지휘부가 자리 잡고 있는, 농장이 나가면서 이미 철수해간 학교운동장에 집결하였다. 싸움 도중에 중상을 입고 여단 군의소에서 치료를 받던 대대장과 다른 사람들까지 한명도 빼놓지 말고 참가시키라는 별도의 여단장명령이 떨어졌다. 우리는 전날의 불상사 때문에 다른 부대하고 임무가 바뀌어서 철수해 갈 가능성이 높다는 쪽으로 나름대로의 생각들을 하고 있었다. 잠시 뒤에 집결해 있는 여단대열 앞으로 조금 전에 평양에서 직승기를 타고 내려온 사복차림의 사람들과 함께 국에서 내려온 간부들, 검사들, 여단지휘부 간부들이 나타났다. 또한 국의 검사들과 함께 온 무장한 보위중대소속의 한 개 소대가 여단 대렬 앞에 공포분위기를 조성하며 나타났다. 전 여단이 지켜보는 앞에서 검은 선글라스를 낀 여성이 맨 앞에 나서서 정렬해 있는 여단을 한번 휘둘러보더니 뒤에 서있는 평양에서 같이 온 일행에게 무슨 말을 하는지 몇 마디 지시하는 것이 보였다.

잠시 뒤에 여성의 지시를 받은 일행 중 한명이 여단장에게 다가가더니 귀속 말로 무엇인가를 전달했다. 여단장은 그의 말을 듣고 꽃 곧 하게 차렷 자세를 취하더니 여단 전체에 명령을 내리였다. “여단 차렷! 3대대는 제자리에 그 밖의 다른 대대는 좌우로 돌 앗. 3대대를 기준으로 좌우로 각각 백보씩 앞으로 갓” 싸움에 참가하였던 우리 대대만 남고 다른 대대는 우리 대대를 중심으로 좌우로 백발자국씩 이동하였다. 그 순간 나는 부대가 다른 데로 이동하기 위해서 비상소집을 한 것이 아니라 어떤 처벌을 하기 위해서 모인 것이라고 단번에 짐작하였다. 아니나 다를까 검은 선글라스를 끼고 있는 여성이 여단장에게 뒤로 물러서라고 고개 짓을 하더니 대대 앞으로 다가왔다. 그는 날카로운 목소리로 어제 싸움에 참가했던 사람들은 그 자리에 남고 나머지 사람들은 뒤로 오십보 물러나라고 명령했다. 대오가 갈라지자 그는 대대정치지도원과 보위지도원을 불러서 그들에게 양쪽의 인원들을 정확히 확인하라고 명령하였다. 그들이 한 사람 한 사람 양쪽을 다 확인하고 정확하다고 보고를 하자 검은 선글라스를 낀 여성은 공병 국에서 내려온 검사를 앞으로 불러서 싸움에 참가하였던 사람들의 이름을 호명하게 했다. 한눈에 봐도 틈새가 안보일 정도로 깐깐하고 규칙적인 일처리 솜씨였다. 국에서 내려온 검사로부터 싸움에 가담했던 사람들에 대한 확인절차가 끝나자 선글라스 여성이 검사에게 귓속말로 무엇인가 침착하게 지시를 내렸다. 대좌(한국의 대령)를 달고 있는 국의 검사는 딸과 같은 젊은 여성에게 차렷 자세를 하고 깍듯이 거수경례(군인인사)를 붙이더니 이제부터 호명하는 사람들은 대열 앞으로 나오라고 명령했다. 대대장을 포함해서 중대장 이하 중대지휘관들과 사관들을 중심으로 15명이 대열 앞으로 불려나가서 일렬 형대(북한군에서는 가로서는 것을 형 대, 세 로 서는 것을 종대라고 한다)로 나란히 정렬하였다.

도끼로 “평양사자”의 허리척추를 찍은 부분대장을 비롯해서 싸움에 주동적으로 참가한 사람들을 위주로 불려나갔다. 우리 소대에서는 싸움에 본격적으로 가담한 사람이 없어서인지 다행이도 소대장 한명만 불려나가고 나머지 사람들은 한명도 불려나가지 않았다. 선글라스를 낀 여성은 검사가 넘겨주는 자료를 받아서 한참동안 뒤지면서 반복해서 읽어보더니 우리 소대장을 비롯해서 세 명의 이름을 자기가 직접 지명해서 앞으로 나오게 했다. 소대장과 함께 세 명이 그의 앞으로 나오자 선글라스여성은 그들에게 잘못은 크지만 싸움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지 않았기 때문에 다시 한 번 기회를 준다고 경고하고 중대의 대열로 들어가라고 지시하였다. 불려나갔던 소대장이 다시 되돌아오자 나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소대장은 분명히 지옥까지 갔다가 다시 살아 돌아온 사람이었다. 선글라스를 끼고 있는 여성이 검사에게 다시 눈짓을 하자 검사가 국에서 자기가 직접 데리고 내려온 무장한 보위소대인원들에게 대대장을 비롯한 나머지 열두 명을 체포하라고 명령했다. 열두 명은 서있는 자리에서 포승줄에 온몸을 결박당했고 여단지휘부 측면 쪽에 있는 아찔한 높이의 벼랑 쪽을 향해서 나란히 세워졌다. 저 사람들은 살아도 영원히 감방에서 썩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잔뜩 긴장해서 있는데 선글라스여성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당중앙위원회의 위임을 직접 받고 내려온 사람이야. 네놈들이 어제 도끼로 죽인 그 사람이 누군지 알고 있어? 여기 있는 너희들 여단전체를 주고도 바꾸지 못할 사람이었어. 그 사람은 수 십 번을 적후에 드나들면서도 머리털 한 오리 다치지 않던 사람이야. 남조선의 광주에서 적들과 힘들게 싸우면서도 조국이 준 임무를 훌륭하게 수행하고 돌아온 영웅이란 말이야 이놈들아. 네놈들이 저지를 죄가 얼마나 크고 그 후과가 막대한지 너희부모들과 친척들이 평생 살 동안 고통을 느끼면서 알게 될 것이다. 나는 당중앙위원회의 위임에 의하여 오늘 이 자리에서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의 이름으로 너희들을 모조리 처단한다”

모두가 설마 했었는데 그는 말이 끝나기가 바쁘게 잠시의 여유도 두지 않고 단박에 권총을 꺼내 들더니 맨 우측에 차례로 서있는 대대장과 중대장을 향해서 분노를 폭발하듯 공격적으로 탄창하나를 다 발사하였다. 대대장과 중대장이 벌집이 돼서 그 자리에 쓰러지자 무장한 보위소대원들 20명이 나서서 나머지 열 명에게 귀가 멍하게 총탄세례를 퍼부어 댔다. 68년산 자동보총의 요란한 소리는 골짜기를 메웠고 포승줄에 결박당했던 12명은 일분도 채 되지 않아서 그 자리에서 모조리 처형되고 말았다. 그날의 사형은 이전의 관례에서 전혀 찾아 볼 수 없었던 드문 일이었다. 여느 때 같았으면 사형직전에 사형수들에 대한 죄목을 조목조목 읽고 그들이 죽기 직전에 아무 말도 할 수 없게 입에 재갈을 물린 다음 공개처형을 한다고 선포를 하고 사형하는 것이 원칙이었는데 이번에는 아무런 순서도 없이 그냥 서있는 자리에서 가차 없이 쏴버린 것이다. 공개처형하는 전 장면을 보는

. . 노동교화소에 가서 1년 동안 강도 높은 노동생활을 하면서도 늘 나의 머릿속에서 항상 떠나지 않고 맴도는 한 가지가 꼭 있었다. 전 여단이 지켜보는 앞에서 권총을 빼들고 대대장과 중대장을 직접 총살하고 평양으로 올라간 선글라스의 매력적인 여성이 들려준 발언, “평양사자는 남조선에 수십 차례씩이나 드나들면서 공을 세웠고 1980년 5월 18일에 일어났던 광주인민항쟁 때에도 참가하여 용감하게 싸운 공화국영웅”이라는 것이었다. . . 광주항쟁이 치열할 때 북한에서 파견된 특수부대사람들이 남조선에 내려가서 배후교란작전을 했다는 소리는 항쟁당시부터 북한군내에서 너무 많이 퍼진 소문이어서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보았지만 실지로 갔다 온 사람을 만나 보기는 처음이여서 대대가 해산된 이후에 많은 시간이 지났어도 선글라스여성의 말이 놀라웠고 솔직하게 믿겨지지 않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가 사망한지 하루 만에 북한에서는 특별한 일 외에는 절대로 뜨지도 않고 일상에서도 보기 힘든 직승기까지 동원되었고, 북한의 최고기관인 당중앙위원회까지 개입돼서 일사불란하게 뒤처리를 한 사실을 보면 “평양사자”라는 사람이 어떤 존재라는 것은 누가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지 않아도 머리가 있는 사람이면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 . 

공화국 2중 영웅이 남긴 자서전

1983년 11월 24일 노동교화소를 나오고 몸이 많이 부은 상태여서 집에서 쉬고 있는데 어느 날 우리와 함께 출당 제대된 소대장이 1분대장과 함께 황해남도 해주에서 우리 집을 찾아왔다. 모두가 다 부대에서 불명예스럽게 처벌제대 된 신세들이라 사회에 나와서 만났어도 시름이 깊었고 고민이 많은 얼굴색들이었다. . . 우리 집에서 하룻밤을 자고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서 소대장이 문득 나에게 자강도 희천에 한번 가보지 안겠는가고 물었다. . . 자강도 희천에 있는 “평양사자”의 무덤에 가서 죄도 빌 겸 가는 길에 그의 어머니를 만나서 위로를 해주고 오자고 말하였다는 것이다. . . 나는 어머니에게 부탁해서 소대장과 1분대장이 준비해가지고 온 음식에 몇 가지를 더 보태가지고 그들과 함께 밤 시간 때에 출발하는 꽁차(여행증명서가 없이 탄다는 뜻. 일명 도둑 차)를 타고 자강도 희천으로 향했다. . .해가 넘어갈 무렵에야 “평양사자”의 집 앞에 도착하였다. 저녁준비를 하는지 굴뚝에서는 하얀 연기가 구름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 마당 안으로 들어서면서 둘러보자 “평양사자”의 집은 일 년 전 결투가 벌어질 때 남겨놓은 흔적들이 곳곳에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 . 1년 전보다 머리가 더 하얗게 희신 “평양사자”의 어머니가 얼굴을 내밀고 문밖에 서있는 우리를 한참 바라보시다가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으면서 서럽게 통곡을 하시였다. “아이구 못난 사람들아 아들 죽여 놓고 무슨 염치로 내 집에 왔어. 아직도 아들이 이 가슴에서 떠나지 않고 있는데 무엇 때문에 다시 왔어”

소대장과 함께 우리는 어머니를 끌어않고 함께 울었다. 소대장이 어머니한테 속죄를 받으려고 왔으니 우리를 죽여 달라고 하자 한참동안 서럽게 목 놓아 울던 “평양사자”의 어머니는 눈물을 그치고 오히려 치마폭으로 우리의 눈가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 주셨다. 우리를 보면 따귀를 후리고 머리털을 잡아서 뽑아버릴 줄 알았는데 정말로 생각지 못했던 어머니의 자애로움이었다. . . 다음날 아침에 해가 떠오르자 어머님과 함께 준비해가지고 간 술과 음식들을 가지고 공화국영웅인 “평양사자”의 무덤을 찾아 갔다. “평양사자”는 양지바른 산기슭의 아늑한 곳에 남쪽을 향해서 누워있었다. 먼저 돌아가신 아버지의 묘가 위쪽에 안장되어 있었고 바로 그 아래쪽에 아들인 “평양사자”의 묘가 일반사람들의 묘지와는 완전히 구별되게 웅장하게 꾸며져 있었다. 어머님의 말에 의하면 “평양사자”의 장례식은 원래 평양으로 옮겨져서 치를 예정이었는데 어머니가 고향땅에 묻히게 해달라고 간절히 요구하는 바람에 날자가 늦어져서 결국은 5일장으로 치러지게 됐고 중앙당에서 간부들이 직접 내려와서 엄숙하게 치렀다고 했다. 시멘트 콘크리트로 포장한 묘지의 높이는 1.5미터가 넘어보였고 묘지의 앞에 서있는 비석에는 중앙당에서 직접 새긴 문구가 적혀 있었다. 다는 외우지 못했지만 지금까지 나의 머리에 남아있는 “평양사자” 묘비에 새겨져있는 내용은 대체로 이러하였다.

“공화국 2중 영웅 고 장중한 동지는 1980년 5월 18일, 남조선의 광주인민항쟁을 비롯해서 살아생전 당과 수령, 남조선 혁명과 조국통일을 위해서 헌신적으로 싸우다가 애석하게 전사하였다. 조국을 위해서 젊음을 바친 고 장중한 동지의 투철하고 고귀한 혁명업적은 조국의 미래와 더불어 후손만대에 영원히 전해질 것이다. 애석하게 전사한 장중한 동지에게 영광이 있으라!”

. . . “평양사자”와의 만남이 끝나고 집으로 내려오면서 무엇인가 어머니를 도와주고 가야 되겠다는 생각이 떠올라서 소대장에게 내 생각을 말했더니 소대장도 참 좋은 생각이라며 수긍을 하였다. 소대장이 우리의 생각을 어머님께 말씀드리자 어머니는 한 달이고 두 달이고 놀다가 가는 것은 좋지만 제발 그러지 말라고 말리셨다. 우리는 며칠 동안 어머니의 집에 함께 머무르면서 구석구석 남자들의 손길이 필요한 일들을 찾아서 정성껏 도와주었다. 공화국 2중 영웅의 집안이라 당과 국가에서 물론 알아서 책임지고 도와주고 있었지만 외롭게 홀로 사시는 어머니를 남겨두고 그냥 떠나자니 아무래도 마음이 걸리고 발길이 도저히 떨어지질 않았다. 묵은 지 3일째 되던 날 우리 세 명이 어머니가 겨울에 땔 장작을 하루 종일 패서 크게 무지를 가려놓고 저녁밥을 먹는데 어머니께서 장롱 문을 여시더니 두툼한 책 한권을 우리 앞에 가져다 놓으시면서 말씀하셨다. “작년 내 진갑 때 우리 아들이 평양에서 오면서 가지고 온 공책인데 날보고 어느 누구한테도 절대로 보여주지 말고 잘 건사해두라고 당부한 거네. 아들이 죽은 다음에 생각날 때마다 꺼내서 들여다보긴 하는데 눈이 잘 보이지 않으니까 머라고 적혀 있는지 내가 도무지 알 수가 없지. 머라고 적혀 있는지 눈이 잘 보이는 사람이 어디 한번 읽어 바”

겉 폐지는 많이 낡고 부풀어 있었지만 꽤나 두툼해 보이는 책이었다. 호기심이 당겨서 어머니께서 주시는 책을 내가 받아들고 겉 뚜껑을 펼치자 자필로 쓴 깨알 같은 작은 글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첫눈에 보아도 책의 내용이 자서전과 비슷하다는 느낌이 단번에 안겨왔다. 첫 머리의 내용은 필자가 어릴 때 집을 떠나 어느 무인도와 같은 섬에 가서 생활하면서 훈련을 받던 상황이 구체적으로 적혀 있었다. 나는 책에 적혀있는 내용이 범상치 않아 어머니에게 먼저 읽어보고 말씀드리겠다고 말하고는 절반도 안 먹은 밥숟가락을 놓고 “평양사자”가 남기고 간 자서전을 읽기 시작했다. 나는 그날 밤 한잠도 안자고 새벽 첫 닭이 울 때까지 자서전을 다 읽었다. 자서전이라기보다 “평양사자”의 집안 환경으로부터 시작해서 집을 떠나게 된 사연, 15년 동안 특수훈련을 받던 일들과 남조선에 나가서 공작하던 내용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그대로 소상하게 적혀 있었다. “평양사자”가 자기가 직접 활동한 내용들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전부 기록으로 남겨 놓았다는 것이 실로 놀라웠고 감탄이 가는 일이었다. “평양사자”는 자기가 철없는 어린 나이에 특수훈련소에 불려간 것은 아버지의 과거 경력과 출신성분이 나빠서였다고 적고 있었다. 그의 아버지의 고향은 전쟁 전에 남조선이었고 국군출신이었으며 전쟁 중에 포로가 되어 북한인민군으로 강제 편입된 사람이었다. 대남첩보기관에서 어린 나이에 그를 데려가서 대남공작원으로 훈련시킨 목적은 남조선에 있는 아버지의 친척들을 비롯해서 사회적으로 배경이 있는 인사들을 포섭할 목적이 기본이었고 그들을 이용하여 남조선에 북한의 지하조직망을 형성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다.

실제로 “평양사자”와 함께 특수훈련소에 불려온 애들은 거의가 다 부모들이 남조선에 친인척이 있거나 연관이 있는 사람들이었다고 적혀 있었다. 무인도에서의 15년 동안 특수훈련과정은 북한에도 저렇게 야생적으로 훈련을 시키는 데가 있긴 있는가하고 의혹이 들 정도였다. 18세기 영국소설에서 나오는 로빈손크루소가 어느 무인도에 갇혀서 28년 동안 야생인으로 살다가 극적으로 구조돼서 인간세상으로 돌아왔다는 이야기는 “평양사자”가 말하고 있는 북한무인도의 내용에 비하면 무색할 정도였다. 자서전의 내용 중에서 가장 비중이 큰 것은 그가 남조선에 내려와서 대남공작을 시작하면서 진행한 일들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적혀 있었다. 그의 아버지 친척들의 이름을 비롯해서 자기가 공작한 대상들의 이름이 개별적으로 적혀있었고 특히 지금까지 내 머리 속에 기억으로 남아 있는 것은 종교와 관련된 사람들의 명단 속에 있던 죽은 문익환 목사의 이름이었다. 1989년인가 문익환 목사가 평양을 방문해서 김일성과 만났을 때 나는 “평양사자”의 자서전에서 보았던 문익환 목사의 이름이 나도 모르게 순간적으로 머릿속에 떠올랐던 기억이 있다. 어렴풋이 생각되는 내용이지만 “평양사자”가 남파되어 문익환을 만나서 김일성의 친서를 전달하자 그는 감격의 눈물을 흘리면서 생의 마감까지 수령님께 목숨을 바쳐 충성을 다하겠다고 맹세를 했다고 하였다. 특히 1980년 5월 달에 있은 남조선의 광주인민항쟁 전후 배경에 대해서는 대체로 이런 식의 내용으로 적혀 있었다.

“남조선의 전라남도 광주는 해방 전부터 인민들의 애국심과 혁명적인 열기가 다른 곳에 비해서 특별했고 사회주의 공산주의 이념에 대한 의식도 대단히 강하다는 것을 5.18이 시작되기 전부터 첫눈에 알 수 있었다. 그들의 머릿속에 잠재해 있는 혁명적인 사고방식은 5.18사건이 시작될 수 있는 충분한 원천이었고 원동력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김대중을 비롯한 남조선의 재야인사들은 이미 북조선의 지령을 충실히 집행할 수 있는 정신적인 준비가 되어있는 상태였고 그들의 주위에 결집되어 그들을 추종하고 있는 많은 친북한적인 세력들도 남조선에서 어떠한 일도 해낼 수 있는 집단으로 충분히 장성되어 있었다. 5.18광주인민봉기가 차질 없이 무장폭동으로 확대될 수 있었던 전적인 배경은 북조선에서 파견된 대남공작원들의 희생적인 노력이 먼저 있었고 남조선 지하조직들의 꾸준한 협조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남조선에 내 집처럼 수없이 드나들면서 정보, 정찰임무를 수행하였지만 광주인민항쟁처럼 남조선정권에 직접적으로 위협을 준 대형사건에 공개적으로 참가해 보기는 처음 이였다” 

내가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는 “평양사자”의 자서전과 같은 일기를 하나하나 생각해내서 사실대로 적는다면 끝도 없이 이야기가 길어질 것이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떠오르지 않는 부분들을 내 마음대로 비슷하게 만들어서 여기에 올리면 오해의 소지가 있을 수도 있고 정확성도 떨어지기 때문에 신중하게 내가 알고 있는 부분에 대해서만 전달하고 싶은 마음이다. 또한 절대로 사실관계에서 벗어나는 그런 일을 해서는 안 되기 때문에 “평양사자”의 자서전이 말하고 있는 내용들을 그대로 알려주지 못하는 것이 개인적으로도 많이 아쉬울 뿐이다... 현재 남한에서 민주화항쟁이라고 인정되고 있는 5.18광주사건을 국가적인 전복을 시도했던 폭도들의 반란으로 성격을 바꾸는 문제에 대해서 어떤 의미에서 보면 굳어진 성역에 대한 도전이라고 감히 말할 수도 있겠지만 불가항력적인 일도 결코 아니라고 자신할 수 있다. 광주사건에 직접적으로 가담했다고 말하는 북한사람들의 증언을 광주사람들은 물론 친북좌파세력들을 비롯해서 어느 누구도 그것이 무조건 아니고 거짓이라고 부인할 근거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진보라고 자처하며 “인권”과 “민주화”를 지금까지 우려먹고 사는 친북좌파세력들 역시도 광주사건을 사실대로 파헤치는 문제에 대해서는 어떠한 발언권이나 권한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되고 오직 자기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5.18이 어느 방향에서 결론이 나던 순리대로 해결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협조하고 방해를 하지 말아야 할 의무만이 전부이라는 것이다. 5.18광주의 무장폭동이 몰지각하고 여물지 못한 정치꾼이었던 김영삼 정권시기 3김의 굿판에서 정치도박의 편법적인 행위로 민주화항쟁으로 정정되고 인정된 것은 대한민국의 현대판 “아사”를 자초하는 치명적인 실수였다는 것을 당사자들뿐만이 아니라 대한민국전체가 인정해야 할 일이다. 친북좌파세력들이 5.18광주폭동을 민주화운동으로 만들어 가지고 자기들의 생계거리 장난을 하면서 내가 일구어놓은 터 밭이기 때문에 내승인 없이 마음대로 그 영역을 침범하면 용서하지 않는다는 식으로 무지막지하게 설쳐대는 것을 보면 대한민국 국민들의 국가개념에 대한 사고의식이 너무 방만하고 취약하다는 것을 힘들지 않게 엿볼 수 있다. . . 민주화세력으로 위장하여 광주를 근거지로 삼고 “해방군” 행세를 하는 친북좌파세력들에게 ‘너희들의 정체는 도대체 무엇이고 너희들이 추구하는 세상은 어떤 세상이냐’고 단도직입적으로 묻고 싶다... 5.18광주사건의 살인자로 매도되고 있는 대한민국 국군은 하루빨리 그 치욕스러운 불명예와 수치스러운 오명에서 벗어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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