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태우 전 대통령



1988년 2월 25일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한 노태우 후보가 대통령에 취임한다.

 

 

김대중과 김영삼



6월민주항쟁의 결과로 직선제 개헌이 이루어짐으로써, 야권은 정권을 탈환할 좋은 기회를 얻었으나,
이들의 두 우두머리 김대중과 김영삼의 분열로 인해 단일화를 이루어내지 못했고
어부지리로 대통령 자리를 뺏기는 등, 정권 교체를 바랐던 국민들의 원망이 이 두 사람에게 향하고 있었다.


 

 

노태우 전 대통령과 전두환 전 대통령



대통령 노태우와 집권여당 민주정의당은 득의양양, 승리에 고무했고
대선 승리의 기세를 이어 두 달 후 예정되어있는 4월 26일 제13대 총선에서의 승리까지 노려보기로 한다.
그러나 제13대 총선은 오늘날 한국 역사의 지대한 영향을 끼칠 중요한 사건으로 작용하게 된다.

 

 


1. 이 글에 관련된 인물들

대한민국 대통령 노태우



대한민국 대통령 노태우

제13대 총선의 패배로 여소야대 정국이 형성되자 크게 당황하게 된다.
그는 직선제 개헌 이후 최초로 당선된 대통령이었고, 5년의 임기를 안정감 있게 이끌어가고 싶어했다.
이러한 정국을 타개하고자 두개 여당을 포함시킨 삼당합당을 단행, 한국 보수정당의 역사를 새로 쓴다.


 

 

평화민주당 총재 김대중



제1야당 평화민주당 총재 김대중

대선에서의 단일화 실패로 평생동지 김영삼과 원수지간이 되었다.
총선에서 김영삼의 통일민주당을 앞지르는 기염을 토하고 원내 제1야당의 수장이 된다.
삼당합당 이전 노태우의 합당 제안을 거절하였고 야당의 위치를 고수한다.


 

 

통일민주당 총재 김영삼



제2야당 통일민주당 총재 김영삼

대선에서 단일화 실패로 패배하였으나 2위의 성적을 거두었다.
그러나 야권의 정통성을 가리는 선거에서 평화민주당에게 패배하며 위기감을 느끼게 되고
노태우의 제안에 응하여 삼당합당에 참여, 오늘날 한국 정치에 큰 영향을 초래하게 된다.


 

 

신민주공화당 총재 김종필



제3야당 신민주공화당 총재 김종필

대통령에 가장 가까웠었던 때가 있었지만, 끝내 대통령에 당선되지 못했다.
내각 책임제로의 전환을 조건으로 삼당합당에 참여한게 된다.
훗날, 이 노련한 정치가는 이 선택으로 자신의 정치 인생 중 큰 치욕을 맛보게 된다.


 

 

청와대 정무장관 박철언



청와대 정무장관 박철언

박정희에게 김종필이 있었다면, 노태우에게는 박철언이 있었다.
전두환 집권기부터 줄곧 노태우의 곁에서 크게 일하였고 능력이 뛰어났다.
'6공 황태자'라는 별명을 가질 정도의 2인자였다.

 

 


2. 민정 참패 과반 크게 미달

 

 



1988년 4월 26일

대통령 취임(1988.02.25) 두달 후 치뤄진 
제13대 총선에서 여당 민주정의당이 참패하고
야당이 승리하는 여소야대 정국이 형성된다.

 

 



위 사진 자료에 나와있는 의석 수는 비례대표를 제외한 수인데
비례대표를 포함할 시의 최종 결과는 아래와 같다.

민주정의당(여당) 125석
평화민주당(김대중) 70석
통일민주당(김영삼) 59석
신민주공화당(김종필) 35석


70+59+35=164석으로 여당을 39석 차이로 앞지르게 되었고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
이른바 삼김(三金)이라 불리우는 평생을 정계에서 살아온 노련한 정치가들.

대선 단일화 실패로 원수지간이 된 두 사람과
그 두 사람이 평생을 싸워온 박정희 정권의 제2인자

이 세 사람이 힘을 합쳐 대통령과 여당을 쥐락펴락할 수 있는 힘을 갖게 된 것이었다.

 

 



대통령은 야권에서 줄곧 대립해왔던 두 명의 지도자 김영삼과 김대중이 이끄는 전투적인 야당과
비록 자신에게 처세술을 알려주어 살얼음판같은 2인자의 자리를 지킬 수 있게끔 했지만
전두환에 의해 자신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부정축재자로 몰린 적이 있던 김종필 모두가 위협적이었다.






제13대 대선 당시 노태우는 공약으로 '임기 중 중간평가'를 내세웠다.

대통령에 당선된 후 임기 중간에 자신에 대한 평가를 받겠다고 내세운 것이었는데
대선에서는 2등이었지만, 총선에서 3등의 성적을 얻어 체면은 구긴 김영삼이
대통령에 대한 중간평가 공약을 지키라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김영삼은 이를 두고 노태우의 임기 중 평가를 국민투표로 실시하여
노태우 정부에 대한 부정적 평가를 이끌어내 대통령직 사임을 요구할 계산이었다.

 

 



그러나 김대중과 김종필의 생각은 달랐다.
안 그래도 사회가 시끄러운 마당에 중간평가까지 하여 혼란을 가속화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었다.

 

 



김영삼은 조급해졌다.
야권에서의 입지를 자신에게 유리하게끔 전환시켜야 했고
이 방법이 노태우에 대한 중간평가로 정권을 압박하는 것이었는데 실패한 것이었다.

 

 


4. 노태우, 전두환을 버리다

 

 



광주사태에 대한 진상조사는 김영삼과 김대중, 민주화 세력에게 있어서는 반드시 풀어야할 숙제였다.
그들은 대통령 단일화에 실패하여 민주화 세력에게 실망감을 안겼던 과오가 있으며
이를 만회하기 위해서는 이 특종을 선점하여 전두환을 처벌함으로써 만회해야했다.

 

 



삼김은 노태우를 압박했다. 광주사태와 5공화국 비리 등에 대한 청문회의 개최를 요청하였고
여소야대의 정국에서 대통령은 향후 5년간 나라를 이끌어나가며 야당의 협조가 절실하였기에 이에 승낙하게 된다.

 

 



5공비리에 대한 조사로 인해 전 대통령 전두환의 동생인 전경환이 구속되었다.
그는 형인 전두환이 대통령에 재임중일 때 새마을 운동본부 총재를 역임한 바 있는데
이때의 비리 때문에 구속에 이르기까지 하였고
이는 곧 민주화 시대의 국민들을 충분히 분노케하기 쉬운 이슈였다.

 

 



1988년 9월 17일

혼란스러운 정국 속에 대통령은 국가적 대경사인 88올림픽의 개최를 선언하였고
88올림픽은 대한민국의 경제적 발전과 위상을 세계에 떨치며 성공적으로 치루어졌다.

 

 



다만, 대외적으로는 한국의 기상을 높이 떨쳤으나
대내적으로는 전 정부를 볶아대며 최종적으로 전두환의 출석을 요구하는 청문회가 지속되고 있었다.
날이 가면 갈수록 청문회의 열기는 뜨거워졌고, 야당의 세는 강해졌다.

 

 



1988년 11월 19일

서울에서 전두환 구속, 노태우 퇴진을 외치는 1만명이 운집하는 시위가 발생하였다.
원내, 원외 할 것 없이 광주사태의 책임자 전두환을 처벌하는 목소리가 커졌고
덩달아 노태우 정권의 퇴진까지 주장하는 시위가 한순간에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1988년 11월 23일

민주화 시대의 개막으로 한순간에 터져나온 목소리들은 정부를 위협하기에 충분했다.

전 대통령 전두환이 5공화국 정부에 대한 비리, 측근들의 비리 등에 대해 대국민사과를 표명하고
강원도 인제군에 위치한 백담사로 떠나게 된다.

노태우 회고록에 근거하면,
전두환이 백담사로 가기 전날 노태우에게 전화를 걸어
"각하에게 도움이 된다면 내가 가겠다"고 했다고 한다.

 

 


5. 대통령의 고심

 

 



1989년 12월 31일

대통령은 1년 넘게 지속되고 있는 청문회로 인해 골머리를 앓았다.
정부의 성공을 위해 더 이상 청문회 정국으로 이끌려다닐 수 없다고 판단,

전두환을 청문회에 세우라는 야당의 조건을 받아들여 80년대의 마지막 날
전 대통령이 온 국민이 지켜보는 청문회에 출석하여 증언을 하게 된다.

 

 



그렇게 1990년이 밝았다.

 

 



세계 정세는 급격하게 변화하고 있었다.
2차세계대전의 종전 이후 줄곧 이어져온 냉전이 끝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대통령은 자신이 맡은 대통령의 직무를 소홀히 할 생각이 없었고
민주화 이후 대한민국을 안정시키는 것과 동시에
공산권과 수교를 진행하려는 북방정책을 구상하고 있었다.

자고로 정부가 일을 잘 하려면 여당이 뒤를 받쳐주어야 한다.
그러나 위에 밝혔다시피 총선의 패배로 여당은 힘없이 야당에 이끌어다니기만 할 뿐
독자적으로 일을 구상하고 진행할 여력조차 없었던 것이 현실이었다.

대통령은 여소야대 정국을 타파하고 싶어했다.


5. "각하, 자민당처럼 보수대연합을 하셔야 합니다."

 

 



박철언은 노태우 대통령 영부인 김옥숙의 고종사촌이다.
전두환 대통령 집권기에 정무비서관, 법무비서관 등을 역임했으며
안기부(현재의 국정원) 국가안전기획부장 특별보좌관 등의 직위를 수행했다.

제13대 대선 당시 박철언은 노태우를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였고
사람들은 그가 노태우 정권의 2인자라는 사실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는 최병렬 정무수석비서관과 함께 대통령에게
일본의 자민당처럼 합당을 하여 여소야대 난국을 헤쳐나갈 것을 제의했다.

 

 



자유민주당, 약칭 자민당.
1955년 일본민주당과 일본자유당이 합당하여 생겨난 정당으로
1990년 기준, 벌써 35년간 거대집권여당의 행보를 이어가고 있는 정당이었다.

 

 



대통령은 이를 옳게 여기고 삼김과의 합당, 대연합을 위해 움직이기 시작한다.

 

 


6. 김대중과의 합당?

 

 



노태우는 우선 김대중과 접촉했다.
그는 김대중과의 비공개 영수회담에서 광주사태의
처리권한을 제시하며 합당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대통령은 성향이 다른 김대중과의 통합으로
민주화 이후 정부를 압박하는 야권을 잠재우고
지역감정의 해소를 이끌어낼 수 있으리라 판단했다.

 

 



그러나 김대중이 누구인가?
13대 대선에서 호남의 몰표를 받고, 사자필승론으로 지역감정 황색바람을 일으킨 선동의 대가다.
당시의 현재도 그렇거니와 앞으로 자신의 정치인생의 텃밭인 호남의 통수를 칠 리가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이 박정희, 전두환 정권에 항거하여 살아온 사람이니만큼
그 정권의 연장선에 있는 대통령과의 합당은 할 수 없지만
정부와 여당에 협조하겠다고 거절 의사를 밝혔다.

 

 


8. 김영삼의 위기감과 대통령의 제안

 

 



김종필은 전두환의 등장으로 온갖 수모를 겪은 그를 배려해준 노태우에게 2인자로써의 처세에 대해 조언해주었다.
김종필은 누구나 알다시피 노태우와 같은 보수성향의 정치인이며, 그 정당인 신민주공화당 또한 보수주의를 표방했다.
그는 합당에 호의적이었다.

다만, 여기서 중요하게 넘겨짓고 가야할 문제가 있다.

 

 



김종필은 박정희 정권의 공신이자 2인자, 후계자였다.

그런데 박정희의 3선 개헌과 유신 헌법 개헌으로 인하여 대통령의 자리에 오르지 못했고
박정희 사후에는 전두환의 등장으로 오히려 부정축재자로 지목되어 정계에서 은퇴당했다.

또한, 제13대 대선에서는 182만여 표(8.1%)의 저조한 득표율을 얻고 낙선했다.
그는 대통령의 꿈을 져버리지 못했지만, 현실 감각이 뛰어난 이 정치인은 현실을 인정했다.

'내 생애 살아서는 대통령에 당선되지 못한다'라는 것을...

이로 인해 김종필은 대통령은 아니지만 국가를 운영할 수 있는 자리를 고집하게 되니,
그가 합당의 대가로 내세운 것이 바로 의헌 내각제로의 개헌이었다.

 

 



김영삼은 제7대 대통령 선거 경선에서 40대의 나이였던 그때
그는 이미 김대중에게 한번 패배를 한 적이 있었다.

 

 



그때는 패배를 인정했다.
독재자 박정희를 이기기 위해, 이 땅에 민주화를 안착시키기 위해서는 그럴 수 있었다.

 

 



그러나 전두환의 등장으로 대통령의 꿈은 멀어져만 갔고

 

 



수 년을 기다려 얻은 기회는 그의 친구이자 후계자인 노태우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김영삼의 입장을 생각해보자.
김영삼은 이미 제7대 대선 당시 김대중과의 경선에서 패배를 인정하고 김대중을 지원했다.
그런데, 이번 대선에서 김대중은 양보를 하지 않고 자신 또한 출마하여 야권의 표가 갈려 패배했다.

게다가 이 김대중보다 못한 총선에서의 성적.
김영삼은 치욕스러웠고 창피하였으며 부끄러웠고 초조했다.

그런데, 이렇게 절망스러운 상황 놓여진 그에게 하늘에서 동아줄이 내려왔으니...

 

 



그것은 바로 대통령의 합당 제안이었다.

 

 


9. "JP를 끼면 이미지가 나빠져서 안돼"

 

 



김영삼은 박정희 정권 초기부터 줄곧 정부여당에 맞서 싸우며 살아왔다.
박정희에 의해 의원직에서 제명 당하고, 이는 곧 박정희의 죽음으로 이어지게 되는 등
박정희와는 악연이면 악연이었지, 절대로 좋은 인연으로 엮이지는 않았었다.

그런데다가 또 자기가 반대했던 전두환 정권의 연장선에 있는 노태우의 정당과 합당을 하는데
박정희 정권의 2인자였던 김종필까지 들어간다?

꼬장꼬장한 성격의 김영삼이 이를 용납할 수 없었다.
바로 난리를 치기 시작했다.

"김종필을 왜 끼나? 김종필을 끼면 당 이미지가 나빠져서 절대 안된다."

 

 



결국에는 박철언의 계속된 설득에 의해 김영삼은 자신의 입장을 어느 정도 굽혔다.
대신 한 마디를 덧붙였다.

"김종필은 그냥 껴주는거지, 주류가 되선 안 된다."

 

 


10. "내각제 개헌은 비밀로 하자"



민주정의당,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의 합당이 기정사실화 되고
이제 공표하기 전 이들은 최종점검을 실시했다.

제13대 국회 이내에 내각제 개헌을 실시하고
제14대 총선이 끝나면 김영삼이 당 총재를 맡는다.


거의 김영삼에게 당권을 양도하는 수준이었으며
김영삼은 이 합당으로 가장 큰 이득을 본 수혜자가 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김영삼은 노태우와 김종필에게 한 가지를 요구한다.
바로 "내각제 개헌에 대한 이야기를 국민들에게 꺼내지 말아달라"는 것이었다.

1. 내각제 개헌에 대한 국민들의 거부가 있을 것이다.
2. 평민당(김대중)의 극렬한 반대가 있을 것이다.
3. 아직 통민당(김영삼) 소속 의원들에게 충분한 설명을 하지 못했다.

노태우와 김종필은 이를 받아들여줬다.
그러나 이 요구를 들어준 것은 그들에게 있어서 크나큰 실수였다...

 

 


11. 그 날

 

 



1990년 1월 22일

민주정의당,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 3개의 정당이 합당하여 217석의 거대여당 민주자유당이 탄생한다.
128석의 민주정의당은 합당으로 과반 의석을 차지하였으며, 김대중의 평화민주당은 이를 강력하게 비난했다.

 

 



김대중이 난리를 치건 말건 각기 속이 다른 세 사람이 모여
새 정당의 탄생과 앞으로의 동거를 위해 축배를 들기 시작했다.

 

 


현재의 자유한국당의 전신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12. 그 후..

 

 



김영삼은 합당에 대한 정보를 자신의 최측근들에게만 설명했다.
갑자기 합당 소식을 들은 통일민주당 소속 국회의원들 중 이에 반대하는 이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당시 김영삼이 영입했던 노무현의 경우에도 그러했다.

대개 김영삼에게 반발했던 의원들은 김영삼의 설득으로 민주자유당 당적을 유지하였으나
이를 반대한 몇명의 의원들은 이를 따르지 않고 탈당하여 민주당(약칭 꼬마민주당)을 창당하게 된다.

 

 



김영삼은 협의했던 것과 같이 새롭게 창당된 민주자유당의 당 총재가 되었다.
그는 당권을 쥐게 되자 180도 돌변하였고 정권의 핵심이었던 박철언과 사사건건 대립했다.

 

 



결국 이 길고 긴 싸움에서 박철언이 패배, 김영삼이 승리하였고
김영삼은 제14대 대통령 선거 민주자유당 후보로 출마,
김대중을 꺾고 꿈에 그리던 대통령에 당선된다.

 

 



박철언은 제14대 대선 당시 민주자유당을 탈당,
현대를 세운 정주영의 통일국민당에 입당하여 정주영을 도왔으나 패배했다.

김영삼이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 슬롯머신 사건으로 구속되었다.

 

 



김종필은 토사구팽 당했다.

합당 당시 약속했었던 내각제로의 개헌을 이루지 못하였고,
김영삼 정권 당시 민자당 내에서 김영삼계와 갈등을 반복한 끝에 탈당하여 자유민주연합을 창당했다.

 

 



김영삼 정권 말기

김영삼은 12.12사건과 5.18광주사태에 대한 책임을 물어
태우와 전두환을 법정에 세운다.

'전두환 사형, 노태우 무기징역'

 

 



이 둘은 제15대 대선 종료 후, 김대중이 취임하기 전에 석방되었다.

 

 


13. 현재

 

 



김영삼은 이른바 젊은 피 수혈을 주장하며 김무성을 비롯하여

 

 



당시 운동권이었던 김문수, 이재오, 손학규 등을 영입하였고

 

 



샐러리맨의 신화로 여겨지는 이명박을 정계에 영입하였다.

그때 김영삼이 영입했던 인물들이 지금의 대한민국 정치계에 이름을 남기는 사람들로 성장하게 되며
보수정당 계파 속 친박 세력과 대립을 하며 현재에 이르고 있다.

 

 



박철언을 구속하게끔 한 슬롯머신 사건을 지휘한 홍준표 또한 김영삼에 의해 정계에 영입되었다.

 

 



현재 대한민국 보수정당의 지지자들은 전 대통령 박근혜를 두고
그의 탄핵을 주도한 YS계열(비박)과 박근혜를 지지하는 친박 세력의 암투가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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