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 의사의 단지장과 독립
이것을 한일전 대립구도에 이용하는 더불어민주당
정치 마케팅 도구가 되어버린 안중근 의사...


 

더불어민주당이 김구 약빨로는 안될것 같은지 한국인들에게 존경을 받는 안중근 카드를 꺼내 들었다. 

과연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가 안중근 의사에 의해서 총맞고 피뿜으며 뒤진이후

당시 조선 당국의 공식반응은 어떠했을지에 대해서 서술하고자 한다. 

 

 

 

 

안중근 의사에게 사살되기 전 이토 히로부미


 

10월 26일

 

 이토 태사가 안중근에게 피살되다

 

황태자가 직접 전보로 아뢰기를,

"이토오〔伊藤〕 태사(太師)가 오늘 오전 9시에 하얼빈〔哈爾賓〕 역(驛)에 도착하여 우리나라 사람의 흉악한 손에 의하여 피살되었으니 듣기에 놀랍기 그지없습니다. 세상을 떠났다는 보도는 아직 하지 않고 있는데 영구가 돌아온 뒤에 공포한다고 합니다. 일본 황실에서 시종 무관(侍從武官)과 시의(侍醫)를 파견하기 때문에 신도 김응선(金應善)을 파견하려고 합니다. 황실에서 일본 황실에 직접 전보를 보내어 위문하기 바랍니다."

 

 

 

조선 황실의 고종 황제와 순종 황제

 

 

당시 조선 황실(...)에서는 조선인에 의해 죽어버린 이토 히로부미를 위문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10월 26일

 

일본 천황에게 이토 히로부미의 죽음을 애도하는 전보를 보내다

 

일본 천황 폐하에게 직접 전보하기를, "바로 오늘 이토오〔伊藤〕 공작(公爵)이 하얼빈〔哈爾賓〕에서 흉악한 역도에게 화를 당하였다는 보고를 받고 놀랍고 통분한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이에 삼가 똑같은 마음으로 지극한 뜻을 표시하는 바입니다." 하였다. 또 이토오 공작과 공작 부인에게도 직접 전보를 보냈다.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안중근 의사를 '흉악한 역도'로 표현하며 일본 황실과 이토의 유족의 슬픔에 공감하고 있다.

조선 황실은 이토록 국제정세에 무지했으며, 그저 일제의 분노가 무서워 덜덜 떨고 있는 모습이다.

 

 

 

10월 27일

 

윤덕영에게 이토 태사를 위문하도록 명하다

 

시종원 경(侍從院卿) 윤덕영(尹德榮)에게 대련(大連)에 나아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태사(太師)를 위문하고 오라고 명하였다.

 

 

 

윤덕영

 

윤덕영은 일제강점기 일본제국의회 귀족원 칙선의원, 중추원부의장 등을 역임한 관료.

현재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되어 있는 인물이다.

 

 

 

10월 27일

 

태황제가 조민희에게 이토 태사를 위문하도록 명하다

 

태황제 폐하(太皇帝陛下)가 승녕부 총관(承寧府總管) 조민희(趙民熙)에게 대련(大連)에 나아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태사(太師)를 위문하고 오라고 명하였다.

 

 

조민희 역시 대한제국기 법부 협판, 경상남도관찰사, 승녕부 총관 등을 역임한 관료로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10월 27일

 

이완용이 정부 대표로 이토태사를 위문하다.

 

내각 총리대신(內閣總理大臣) 이완용(李完用)이 정부 대표로 대련(大連)에 나아가 이토오〔伊藤〕 태사(太師)를 위문하였다.

 

 

 

이완용

 

말이 필요없다. 당시 조선 황실은 무엇이 어떻게 되어 가는지조차 제대로 알지 못했던 모양.

 

 

 

10월 27일

 

이토 태사의 죽음 때문에 태황후의 탄신일 잔치를 그만두도록 하다

 

곤원절(坤元節) 사연(賜宴)을 정지(停止)하라고 명하였다.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태사(太師)가 화를 당하였기 때문이다.

 

 

이토 대사가 아닌 태사로 표기되어 있으며, 조선황실은 이토 히로부미의 죽음으로 행정 및 행사를 올스톱한 상태.

 

 

 

10월 27일

 

일본 천황이 전보를 보내다

 

 

 

다이쇼 천황

 

 

일본국 천황 폐하(天皇陛下)가 직접 전보를 보내왔다. 그 전보문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화를 당한 데에 대하여 심심한 동정(同情)을 표시하여 준 것을 짐은 감사하게 여기는 바입니다."

하였다.

 

 

 

10월 28일

 

태자 태사 이토 히로부미에게 문충공이라는 시호를 주다

 

태자 태사(太子太師)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죽은 것과 관련하여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태자 태사 이토오 히로부미는 뛰어난 기질에 세상을 구제할 지략을 지녔고, 시대의 운수를 만회시키고 문명을 발전시키는 일에 수고를 아끼지 않았으며, 자신의 한 몸을 아랑곳하지 않고 스스로 맡아 나섬으로서 단연 동양의 지주(砥柱)가 되었다. 일찍이 평화로운 큰 국면을 이룩하는 것을 기본으로 삼았으며 더욱이 한국과 일본과의 관계에 대하여 주의를 돌렸다. 그리하여 일찍부터 우리나라에 왕래하면서 위태롭고 어려운 국면을 부지하고 수습하여 나갔으니, 그것은 전적으로 그의 큰 계책에 기인한 것이었다.

 

지난번에 통감(統監)으로서 대궐에 상주하여 있으면서 수시로 만나 정성을 다하여 인도하였으며 태사의 임무를 맡아 우리 태자를 보좌하고 인도하여 예학(睿學)을 진취시키는 데 모든 것을 다 하였다. 노령(老齡)에도 불구하고 먼 길을 동반(同伴)하여 순행하였으며 휴식할 사이도 없이 계속하여 만주로 행차하였다. 속히 무사히 돌아오면 길이 의지하려고 하였는데 뜻밖의 변고가 생겨 놀라운 기별이 문득 올 줄을 어찌 생각이나 하였겠는가? 놀랍고 아픈 마음 끝이 없다.

 

 

 

의친왕 이강

 

 

고(故) 이토오 태사의 상(喪)에 특별히 의친왕(義親王) 이강(李堈)을 보내어 치제(致祭)하고 장사 지내는 자리에 참가하게 하며, 장사에 소용되는 물품을 궁내부(宮內府)로 하여금 실어 보내주게 하라. 특별히 문충(文忠)이라는 시호를 추증(追贈)하라."하였다.

 

 

대한제국의 순종은 민족의 적 이토 히로부미에게 문충공의 시호를 내린다.

조선 민중의 적은 일제도 아니고, 제국의 침략도 아닌 조선 황실 그 자체였던 것이다.

 

 

 

10월 28일

 

일본 천황에게 이토 히로부미를 애도하는 전보를 보내다

 

일본 천황 폐하(天皇陛下)에게 직접 전보를 보내기를,

"지난번에 이토오〔伊藤〕 공작(公爵)이 화를 당하였다는 기별을 듣고 근심이 끝이 없었지만 그래도 한 가닥 희망을 가지고 마음속으로 속히 회복되기를 빌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보니 애통한 마음을 어찌 금할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공작이 당한 흉악한 변고가 우리나라 사람의 손에 의하여 생겨났다고 하니 온 조정이 몹시 놀라며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습니다. 이에 끝없는 애도의 뜻을 표하는 바입니다."

하였다.

 

 

 

10월 28일 

 

이토 히로부미 태사의 상사로 인해 사흘 동안 조회와 저자보는 것을 정지하도록 하다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태사(太師)의 상(喪)으로 사흘 동안 정조시(停朝市)하라고 명하였다.

 

 

조선 황실은 이토 히로부미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행정을 멈추고 애도 하는 시간을 갖는다.

코미디가 따로 없다. 조선 황실이 아닌 일본 황실에서도 저런 짓은 없었다.

 

 

 

10월 28일

 

이토 히로부미의 죽음으로 사흘 동안 음악과 노래를 중시시키다

 

내각 고시(內閣告示) 제32호는 다음과 같다.

태자 태사(太子太師) 이토오〔伊藤〕 공작(公爵)이 세상을 떠난 데에 대한 조의를 표시하기 위하여 오늘부터 사흘 동안 한성(漢城) 안에서 음악 가곡(音樂歌曲)을 정지할 것을 명령한다.

 

 

유교탈레반의 국가답게 이토 히로부미의 상이 이루어지는 동안 음악과 노래를 중단시켰다.

기록이 매일 이토 히로부미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들로 채워져 나간 조선 황실사이다.

 

 

 

10월 29일

 

민병석을 일본국 특파 대신에 임명하다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궁내부 대신(宮內府大臣) 민병석(閔丙奭)을 특사(特使)로 가려 파견해서 짐(朕)의 추도하는 뜻을 표시한 친서(親書)를 대일본국 대황제 폐하(大皇帝陛下)에게 봉정(奉呈)하고 태사(太師)의 상(喪)에 치제(致祭)하고 장례에 참가하라."

하였다. 친서에 이르기를,

 

"공작(公爵) 추밀원 의장(樞密院議長)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세상일을 바로잡을 재능과 자신의 한 몸을 돌보지 않는 절개를 지니고 훌륭한 황제를 잘 만나 유신(維新)을 도와서 이룩하였습니다. 그의 원대한 계책은 오직 동양의 평화에 있었고 어진 이를 가까이 하고 이웃 나라와 사이좋게 지내면서 서로 의지하여 함께 살아나갈 것을 생각하였습니다. 전날에 통감(統監)으로 우리나라에 와 있으면서 일이 있을 때마다 지도해주어 문란해진 규율을 정돈하고 태자(太子)를 교육하여 학업이 날로 진보하게 하였습니다. 최근에 비록 해임되어 조정에 돌아갔지만 짐의 마음은 곁에 있는 것처럼 의지하고 믿어왔는데 뜻밖의 변고가 생겨 명철한 사람에게 탈이 날 줄을 어찌 생각하였겠습니까? 생각건대, 폐하는 이 어진 대신을 잃어 여러 번 조회에 임해 한탄하였을 것입니다. 짐 또한 한 스승이며 벗인 그를 잃고 그지없는 근심을 금할 수 없으니 슬픈 마음이 어찌 끝이 있겠습니까?

 

이에 의친왕(義親王) 이강(李堈)을 보내 미리 도쿄〔東京〕에 가서 폐하의 마음을 위로하게 하는 동시에 이토오의 영전에 가서 대신 제사를 지내줌으로써 평소에 서로 좋게 지냈던 짐의 정을 표시하는 바입니다."

하였다.

 

 

아예 황실의 사람을(의친왕) 보내어 일본에 조의를 표시하고 있다.

예전 주인인 중국에 사대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그리고 무엇이 자주국가이고 황실이며 제국이란 말인가.

 

 

 

10월 29일

 

일본 천황이 전보를 보내다

 

일본 천황 폐하(天皇陛下)가 친히 보낸 전보가 도착하였다. 그 전보문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공작(公爵)의 훙거(薨去)에 대하여 폐하가 재차 보낸 심심한 동정(同情)에 대하여 사의를 표합니다."

하였다.

 

 

 

10월 29일

 

태황제가 박제빈을 이토 히로부미 태사의 장례에 보내다

 

태황제 폐하(太皇帝陛下)가 승녕부 부총관(承寧府副總管) 박제빈(朴齊斌)을 보내어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태사(太師)의 상(喪)에 치제(致祭)하고 장례(掌禮)에 참가하라고 명하였다.

 

 

박제빈 또한 일제강점기 승정원 동부승지, 사직서 제조, 승녕부 부총관 등을 역임한 관료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

 

 

 

10월 29일

 

황태자에게 이토 히로부미 태사의 죽음에 대하여 석달복을 입도록 하다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태자 태사(太子太師) 이토오〔伊藤〕 공작(公爵)의 상(喪)에 태자가 스승과 제자 사이의 예의에 따라 석달 복을 입는 규례를 따르도록 궁내부(宮內府)에서는 상복 규정을 정하라." 하였다.

 

 

 

안중근 의사 입장에서는 머리속에 물음표가 가득 떴을 것이다.

 

 

 

10월 30일

 

이토 히로부미의 상사에 조위금을 주다

 

태자 태사(太子太師) 문충공(文忠公)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공작(公爵)의 상(喪)에 특별히 조위금 10만원(圓)을 내렸다.

 

 

이토 히로부미의 죽음은 문충공의 시호에 이어 황태자의 상복입기, 행정 올스탑, 조위금 지불까지 이어진다.

희대의 호구국가 답게 일제의 요구가 아닌 알아서 자진 납세하는 모습이다.

 

 

 

10월 31일

 

조중응을 동경에 보내어 이토 히로부미의 국장에 참가하게 하다

 

농상공부 대신(農商工部大臣) 조중응(趙重應)을 동경(東京)에 보내어 정부를 대표해서이토오〔伊藤〕 공작(公爵)의 국장(國葬)에 참가하게 하는 동시에 공작의 유가족들에게 조의를 표하도록 하였다.

 

 

 

이토 히로부미의 국장 행렬
이토 히로부미의 국장 행렬


 

11월 4일

 

태황제가 통감의 관저로 행차하다

 

태황제 폐하(太皇帝陛下) 통감(統監) 관저(官邸)를 방문하고 통감 자작(子爵) 소네 아라스케〔曾禰荒助〕를 접견하였다. 태자 태사(太子太師) 문충공(文忠公) 이토오〔伊藤〕 공작(公爵)의 국장일(國葬日)에 위문하기 위해서였다. 소네〔曾禰〕 통감(統監)이 창덕궁(昌德宮)과 덕수궁(德壽宮)에 나가서 알현하였다. 국화 화분을 각 2분(盆)을 헌상한 때문이다.

 

 

 

11월 4일

 

이토 히로부미의 추도회를 장충단에서 가지다

 

태자 태사(太子太師) 문충공(文忠公)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공작(公爵)의 국장일(國葬日)에 황족(皇族), 궁내관(宮內官), 각부(各部)의 관리 및 인민들이 함께 장충단(奬忠壇)에서 추도회(追悼會)를 설행하였다.

 

 

 

11월 4일

 

이토 히로부미 태사가 피살된 것과 관련하여 백성들에게 조서를 내리다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나라를 경영하는 요체는 나라의 근본을 튼튼하게 하여 만백성을 보전하는 데에 있다. 요즘 안팎의 정세가 어수선하여 국운의 흥망에 대하여 예견할 수 없고 짐의 나라 형편이 외로우며 허약하여 일본의 보호에 의거하지 않으면 어떻게 그 존립을 보장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황제의 자리에 오른 초기에 종묘(宗廟)에 맹세하여 고하고 이전에 있어본 적이 없는 개혁을 단행하였다. 그리하여 겉치레를 버리고 실질을 취하여 나라를 발전시켜 나갈 큰 계책을 정하고 밤낮으로 조심하면서 일에 못 미쳐 갈까봐 걱정하였다.

 

태자 태사(太子太師) 이토오〔伊藤〕 공작(公爵)은 정성을 다하여 일본 중흥의 큰 위업을 도왔으며 지금까지 대신(大臣)의 중책을 지닌 40여 년 동안 그는 크게 법률을 제정하고 큰 계책을 세우며 늘 중요한 요직에 있으면서 항상 동양(東洋)의 평화로 일관하고 대명(大命)을 받들었다. 통감의 임무를 맡아서는 두 나라의 이해관계의 공통된 근본 의리에 근거하여 짐의 국정을 지도하고 고락을 같이 나누었으며 짐도 그의 정성에 의지하고 신뢰하여 유신(維新)을 시작하는 큰 업적이 점차 이룩되게 되었다. 더구나 늙은 몸으로 태자를 도와주고 키워주었으며 바로잡아주고 도와주는 데에 성의를 다하며 변함이 없었다. 생각건대, 그는 일본 제국의 기둥과 주춧돌이 될 뿐 아니라 진실로 짐의 국가의 사표(師表)로 그의 공훈과 덕행은 지난 옛적에도 비길만한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지난번에 우리나라 국경을 벗어나서 도중에 하얼빈〔哈爾賓〕을 지나다가 짐의 고약한 백성의 흉측한 손에 상하여 갑자기 세상을 떠날 줄을 어찌 생각하였겠는가? 이제 그의 장사하는 날을 당하고 보니 마음이 더욱 아프다. 생각건대, 그와 같은 고약한 도당이 세계 형세에 어두워서 이따금 일본의 두터운 우의를 무시하려고 하다가 마침내는 전에 없던 변괴를 빚어냈으니 이는 바로 짐의 국가와 사직을 해치는 자이다. 짐의 신민으로서 나의 이 뜻을 어기고 흉악한 짓을 더 발생시키는 자가 있으면 민중들이 어떻게 편안하게 살며 국시(國是)가 어떻게 공고해질 수 있겠는가? 너희 신민들은 서로 이끌고 서로 경계함으로써 나의 뜻을 본받도록 하라."

 

 

 

즉 현재의 대한민국 국민들은 항일 정신에 입각하여 위대한 안중근을 숭모하지만,

동시에 이른바 '우리가 지키지 못한 안타까운 역사속의 조선'의 공식반응은 이토 히로부미를 애도했다.

무엇이 역사이고, 무엇이 진실인지 알아야 하는 것이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라는 슬로건에 맞는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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