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사동 유적지 위키백과사전
서울 송파에서는 한성백제 문화제도 개최하고 있다.

 

 

1. 최초의 서울은 현재의 암사동 지역이다. 한성 백제 수도인 위례성이 암사동에 있었다.

 

 

 

풍납토성 위치
풍납토성
몽촌토성

 

 

2. 위례성은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을 합친 개념이다.

  평상시에는 평지인 풍납토성에서 살다가, 외적이 침입하면 해자가 있고 방어시설이 좋은 몽촌토성(아이스만)으로

피신해서 방어를 하게 된다. 풍납이 본성이고 몽촌이 부성인 개념이다. 

 

 

 

삼성동 토성에서 보는 아차산방면

 

 

3. 위례성의 전초기지로 삼성동토성이 있다. 현재의 경기고등학교 자리이고,

한강과 북쪽 아차산쪽을 볼 수 있는 요지이다. 

 

 

 

아차산성

 

 

4. 삼성동토성은  아차산쪽에서 내려오는 적군을 1차적으로 방어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또한 그 전초기지로 아차산에도 산성이 하나 있었는데, 아차산이 공격의 주요 통로 였다는 반증이다.

 

 

 

현재의 삼성동

 

 

5. 현재의 삼성동이라는 이름은 봉은사가 있어 봉은사마을과 춤추는 아이 모양의 바위가 있다고 무동도마을,

닥나무 파는 점포가 있어서 닥점마을 이었는데,

이 3개 마을을 일제시대에 1개로 합치며 삼성리로 이름을 지었고, 이후 삼성동으로 바뀜.

 

 

 

 

 

6. 475년 고구려 장수왕이 아차산쪽에서 위례성을 공격해 함락시켰다.

장수왕은 백제 개로왕과 왕비, 왕자들을 아차산성으로 끌고가서 모두 참수함 

 

 

 

7. 큰아들이 살아남아 공주로 도망가서 백제를 다시 일으켰다.

 

 

8. 특이한 점은 백제는 석축으로 성을 쌓는 것이 아니라, 흙으로 성벽을 세웠다. 

 

 

9. 백제의 토성은 황토,모래등에 석회석을 800도이상 온도에서 구워서 물과섞어서 정사각형 판에 넣고 다지면서 쌓아올리는 방식으로, 현대의 시멘트와 비슷한 강도가 나오며 흙으로 만든 토성이 돌로 만든 석성보다 더 단단해서 1500년을 버티고 있다.

 

 

10. 서울에 있던 백제, 일명 한성백제가 장수왕에게 함락되고 성 내 건물들이 방화로 소실되자 이내 성벽과 무덤만 남게 된 것이다.

 

 

11. 암사동 지역은 퇴적지역이라 돌이 없는 지역이다.

또한 백제가 망하자 암사동 동네 주민들이 수많은 왕족들의 돌무덤을 허물어 무덤에서 나온 돌로 집들을 짓고 살아갔다. 

 

 

12. 돌이 많다고 석촌동이라고 부르게 되었는데, 그 돌이 백제 왕족의 무덤 돌이다. 

 

 

13. 예전 암사동에는 꿈마을도 있었다. 그러나 88올림픽을 개최하면서 이곳 주민들을 다른 곳으로 이주를 시켰다.

이후 그 꿈마을을 한자로 바꾸어 몽촌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14. 암사동 옆에는 탄천이 있다. 이 지명의 유래는 강변에 숯을 구워파는 곳이 많아 탄천으로 불렀던 것이다. 

 

 

15. 조선은 현재 시청쪽에 성을 쌓고 4대문을 만들었다.

성으로부터 10리 범위를 성조십리라고 부르며, 이는 현대의 개념으로 보면 일종의 그린벨트이다. 

 

 

16.성조십리 안에는 일반인들 무덤을 쓸수 없어 10리를 살짝 벗어난 홍제동, 미아리등에 공동묘지, 화장장들이 지어졌다.

 

 

 

한남동 민비서낭

17. 한남동에 가면 민비서낭이 있다. 소위 기도빨이 좋다고 무당업계에는 소문난 곳이다.

 

 

 

18. 임오군란때 민비가 충주로 도주 하였는데, 그때 충주 무당 2명이 극진하게 대우를 하였다고 한다.

이후 민비가 서울로 복귀할때 이들을 데리고 가고, 그당시 천시받는 무당들에게 공신들에게나 주는 '대려'와 '진녕군'이라는 군호도 내려주었다고 한다.

 

 

19. 이는 민비를 무속인들이 숭상하는 경향과도 연관이 있을 것이다.

 

 

20. 목동은 안양천이 넘치면 항상 물에 잠기는 지역이었다.

목동 개발초기 아파트인 목동1.2단지를 지을때 침수 걱정 때문에 1층에 집을 넣지않고 기둥으로 비워버렸는데, 이를 필로티 구조라고 부른다.

 

 

21. 박정희 전 대통령의 부인인 육영수여사가 가장 신경쓴 집단이 문둥이라고 부르던 나환자들이었다. 

 

 

22. 전국의 나환자촌을 다 돌아다니며, 애로사항을 듣고 먹고 살길을 찾아주고자 노력하였다.

문재인과 박근혜가 붙은 대선에서 전라도 지역중 유일하게 박근혜 표가 더 많이 나온곳이 소록도인 이유이다.

또한 19대 대선에서도 전라도에서 홍준표가 유일하게 1등을 한 지역이기도 하다.

 

 

23. 수도권 나환자촌에는 먹고 살 방법으로 양돈을 허용하였다.

 

 

24. 한동안 서울에 공급되는 돼지와 닭 상당부분이 나환자촌에서 키운 것들이였다.

 

 

25. 돼지나 닭을 키우는 것은 폐수를 대량 생산하는 시설이라 수도권 나환자촌은 양돈이 점점 금지가 되며 수도권 바깥으로 이전을 하게 되었다.

 

 

26. 이후 나환자들이 양돈을 하고 모여 살던 곳은 가구단지가 들어서게 되었다. 

 

 

27. 의왕, 일산, 마곡들 수도권 가구단지는 대부분 과거 나환자촌의 자리였다. 이제는 전국에 나환자촌은 88개만 남았다. 

 

 

 

서울 대홍수
서울 대홍수 당시 사진

 

 

28. 1925년 서울에 큰 홍수가 발생했다.

이 홍수는 1925년 7월9일부터 비가 퍼붓기 시작해서, 3일간 계속 퍼붓다가 3일을 쉬고는 다시 5일간 퍼부었다.

반년치 비가 8일간 쏟아진 셈. 이때 내린 비의 양은 753미리 였다고 한다.

 

 

29. 이당시 잠실은 가양동과 붙어 강북이었다. 한강은 잠실 남쪽 석촌호수위로 흘렀고, 이를 송파강이라고 불리었다.

그러나 불어난 강물이 잠실 남쪽 송파강으로 흐르지 않고, 잠실과 가양동 사이로 흘러내리게 되었는데, 이후 잠실과 가양동 사이로 강이 하나 새로 만들어지게 된다. 새로 만들어진 강을 신천이라고 부른다. 잠실 옆의 그 신천이 맞다.

 

 

30. 비가 그친 후에도 대부분 강물이 송파강이 아니라 신천쪽으로 계속 흘러가게 되어,

잠실은 한쪽으로는 새로 생긴 신천이 흐르고, 한쪽으로는 기존 송파강이 흐르는 섬이 되었다.  

 

 

31. 1971년 강남을 개발 하면서 송파강을 매립한다. 그리하여 송파강이 매립되면서 잠실이 섬에서 다시 육지가 되었으나, 강북이 아니라 강남이 된다.

 

 

32. 비가 계속 오자 한강이 넘치게 되었고, 송파, 방배, 용산, 영등포가 물에 잠길 정도라 이내 광화문까지 한강물이 밀고 올라오게 된다. 방배에서는 홍수를 피해 사람들이 높은 곳으로 피신을와서 이후로도 눌러 앉게 되는데 이것이 지금의 서래마을이다.

 

 

33. 그당시 양화대교 중간 즈음에 높은 산봉우리가 있었는데, 이를 선유봉이라고 불렀다. 

대홍수가 끝난후 한강둑을 높이는등 보강사업에 선유봉을 깍아서 사용하였고, 선유봉이 평지인 선유도가 되었다.

'정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정찬성 오르테가 경기 결과 페더급 중계  (0) 2020.10.18
아베 후임은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  (0) 2020.08.30
소주의 비밀2  (0) 2020.02.14
소주의 비밀  (0) 2020.02.14
RSV 평택 산부인과 rsv 신생아 감염  (1) 2020.02.13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