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냥의 역사는 독일의 화학자 헤니히 브란트가 저절로 불이 붙는 인을 처음 발견하였던 1669년에 시작됬지만,
너무나도 쉽게 발화되는 흰 인은 사용하기 쉽지 않고 또한 위험하였다.
그후 1680년에 영국의 과학자 보일이 건조시킨 종이에 인을 발라 문질러
불을 일으키는 원리를 알아냈지만 결국 성냥으로 완성시키지는 못하였다.
그후 1827년이 되어서야 영국의 약제사인 존 워커가 오늘날 우리가 알고있는
'마찰성냥'을 만들어 자신의 고향에서 팔았다.
루시퍼라고 불리우는 이 성냥은
1826년 화학실험 중에 우연히 염소산칼륨과 황화안티모니를 섞는 실험을 하다가 발명되어졌고,
그 방식은 나뭇개비에 두 화학물질을 바르고 종이에 유리가루, 규조토를 발라 서로 마찰시켜 불을 붙이는 방식이였다.
존 워커는 자신이 운영하던 가게에서 루시퍼 성냥을 팔았지만 불꽃이 너무 크게 발생하여
위험한 물건처럼 보였고, 사람들의 눈에는 그다지 쓸모가 있어보이지 않았다.
이후 계속되는 가계부채로 인하여 자신의 성냥레시피를 영국의 사업가인 이삭 홀든경에게 판매하였고,
홀든경은 성냥에 대한 모든 특허를 자신의 이름으로 새로 낸 뒤 이후 스웨덴의 화학회사에 판매하여 큰 이익을 낸다.
결국 최초의 현대식 성냥을 만든 존 워커는 자신의 희대의 발명품으로 인한 수익을 얻지 못한채 사망했다.
2. 전함용 증기엔진
19세기 미국에서 태어난 벤자민 브래들리는 노예의 신분이였다.
그 당시의 다른 노예들 처럼 그는 학교가 아닌 주인의 자녀들에게 교육받으며 자라왔다.
뛰어난 수학 능력과 독서 능력을 가졌던 그는 1830년 경에 기술자로 인정받아
메릴랜드 주 아나폴리스에 있는 미 해병아카데미에서 여러 실험을 돕기 시작하였다.
기술자일을 하던중 벤자민은 기존에 있던 증기기관을 전함엔진으로 소형화 하는데 성공하였고,
이는 수많은 전함에 장착되었다.
하지만 노예였던 그의 신분으로 인하여 특허도 내지 못한채,
이 희대의 발명가는 한달에 고작 2달러를 받았으며, 나머지 수익은 모두 그의 주인에게 돌아갔다.
자신의 발명품으로 큰 이익을 얻을 수 없었지만 이후에 그는 자신이 모아온 돈으로 신분을 사 자유민이 되었다.
3. 감자칩
지금도 우리들에게 친숙한 먹거리인 감자칩은 미국의 요리사 조지 크럼에 의해 발명되었다.
인디언과 흑인의 혼혈이었던 크럼은 다혈질로 화를 잘냈고 냉소적인 사람이었다.
만약 손님이 음식에 대해 불평을 늘어놓으면 다음에는 도저히 먹을 수 없는 이상한 음식으로 만들어 다시 내놓았으며,
그러고는 화를 내거나 문을 박차고 나가는 손님의 반응을 보고 즐기는 괴짜 요리사였다.
1853년 어느 날 자신의 레스토랑을 찾은 손님이 주문한 감자 튀김이 너무 두껍고 제대로 익지도 않았다며
불평을 쏟아내고 다시 만들어오라고 하자 화가난 크럼은 특유의 괴짜 버릇이 발동하여 주방장에게 포크로
감자를 찍을수 없도록 최대한 얇게 썰라고 주문하였다.
그런 다음 냅킨에 싸서 30분 동안 얼음 물에 담가 놓았다가 뜨거운 기름에 넣어 튀겼고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아 감자 위에 소금을 잔뜩 뿌린 후 손님의 식탁에 내보냈다.
그런데 먹을 수 없는 음식을 내왔다며 화를 내며 떠나야할 손님이 오히려 맛있다며 더 달라고 주문을 하자
크럼은 새로운 아이디어를 떠올렷다. 손님이 맛있게 먹는 것을 보고 아예 '포테이토 크런치'라는 메뉴로
새로운 서비스를 시작한 것이다.
이후 크럼의 레스토랑에서만 서비스를 하던 이 음식은 식당의 주방장이 독립하면서
고객을 끌기 위한 마케팅 수단으로 사라토가 칩이란 이름으로 서비스하였다.
하지만 처음 감자칩을 만든 조지 크럼이나 나중에 독립하여 사라토가 칩을 유행시킨
주방장 모두 특허를 받지않아 전 세계적인 음식을 만들어 놓고도 큰 수익을 얻지 못하였다.
4. 마우스
1968년 캘리포니아의 시빅센터에서 열린 합동 컴퓨터 컨퍼런스에 마치 공상과학영화에
나올 법한 특이한 차림의 인물이 발표장 무대 위로 올라섰다.
그의 손에는 네모난 나무통에 두개의 금속 원반을 수직으로 갖다 붙인 기괴한 상자가 들려있었고
청중들은 그때까지 그 누구도 본 적이 없던 새로운 물건을 모두 놀랍고도 궁금한 표정으로 숨죽여 바라보았다.
이날 청중들은 그의 발표와 손에 들린 물건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기존의 복잡한 입력방식이 아닌 조그만한 상자를 휘두르는 것만으로도
고난이도의 작업을 할 수있다는걸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훗날 '마우스'라고 불리는 이 조그만한 상자의 개발자인 더글라스 엥겔바드는
마우스를 전혀 상업적으로 판매할 생각은 없었다. 그는 오로지 과학 혁신과 컴퓨터가 인류에게 유용한 작업 도구로 사용될수 있는지에 더 관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일하고 있던 회사인 SRI는 엥겔바드의 허락 없이 마우스에 특허권을 자사에 부여한 이후
단돈 4만 달러에 APPLE에 팔아 넘겼으며 이로 인한 수익금은 엥겔버드에게 단 한푼도 돌아가지 않았다.
5. 스마일리
누구나 다 아는 이 웃는 표정은 1962년 광고대행사를 운영하던 하비 볼에 의하여 만들어졌다.
메사추세츠 주에 있는 회사인 스테이트 뮤추얼 라이프 어슈런스는
오하이오 주에 있는 개런티 뮤추얼 컴퍼니라는 회사를 인수하였다. 회사는 하나가 됬지만 직원들은 쉽게 하나가 되지 못하였고 서로 보고도 그저 데면데면 했다.
회사 간부진은 직원들을 융화시키기 위하여 '우정 캠페인'을 시작하면서
그 캠페인에 쓸 웃는 이미지를 당시 광고 대행사를 운영하던 하비 볼에게 주문하였다.
볼은 불과 10분만에 웃는 얼굴을 그려서 '스마일리'로 이름 지은 뒤 회사에 넘겨줬으며,
회사는 그것을 뱃지로 만들어 돌렸다.
처음에 돌린 100개에 대한 반응이 좋자 1만개를 제작하기 시작하며 용도가 사내 융화가 아닌 고객 마케팅에 활용했다.
회사는 직원들에게 양복의 옷깃에 스마일리 뱃지를 달고 다니며 전화를 받을 때나 고객을 만나 상담할 때 항상 웃도록 지시했다.
이후 스마일리는 미 전국으로 퍼져 나갔지만 돈을 번 사람은 하비 불이 아닌 머레이와 버나드 스페인이라는 형제였다. 이들은 뱃지와 커피 잔, 티셔츠, 범퍼 스티커 등에 스마일리를 인쇄하여 팔았고 72년까지 5천만개의 뱃지가 팔려나갔다. 볼이 스테이트 뮤추얼 라이프로 부터 불과 45달러밖에 받지 못한 것과 극히 대조적이었으며
6월민주항쟁의 결과로 직선제 개헌이 이루어짐으로써, 야권은 정권을 탈환할 좋은 기회를 얻었으나, 이들의 두 우두머리 김대중과 김영삼의 분열로 인해 단일화를 이루어내지 못했고 어부지리로 대통령 자리를 뺏기는 등, 정권 교체를 바랐던 국민들의 원망이 이 두 사람에게 향하고 있었다.
대통령 노태우와 집권여당 민주정의당은 득의양양, 승리에 고무했고 대선 승리의 기세를 이어 두 달 후 예정되어있는 4월 26일 제13대 총선에서의 승리까지 노려보기로 한다. 그러나 제13대 총선은 오늘날 한국 역사의 지대한 영향을 끼칠 중요한 사건으로 작용하게 된다.
1. 이 글에 관련된 인물들
대한민국 대통령 노태우
제13대 총선의 패배로 여소야대 정국이 형성되자 크게 당황하게 된다. 그는 직선제 개헌 이후 최초로 당선된 대통령이었고, 5년의 임기를 안정감 있게 이끌어가고 싶어했다. 이러한 정국을 타개하고자 두개 여당을 포함시킨 삼당합당을 단행, 한국 보수정당의 역사를 새로 쓴다.
제1야당 평화민주당 총재 김대중
대선에서의 단일화 실패로 평생동지 김영삼과 원수지간이 되었다. 총선에서 김영삼의 통일민주당을 앞지르는 기염을 토하고 원내 제1야당의 수장이 된다. 삼당합당 이전 노태우의 합당 제안을 거절하였고 야당의 위치를 고수한다.
제2야당 통일민주당 총재 김영삼
대선에서 단일화 실패로 패배하였으나 2위의 성적을 거두었다. 그러나 야권의 정통성을 가리는 선거에서 평화민주당에게 패배하며 위기감을 느끼게 되고 노태우의 제안에 응하여 삼당합당에 참여, 오늘날 한국 정치에 큰 영향을 초래하게 된다.
제3야당 신민주공화당 총재 김종필
대통령에 가장 가까웠었던 때가 있었지만, 끝내 대통령에 당선되지 못했다. 내각 책임제로의 전환을 조건으로 삼당합당에 참여한게 된다. 훗날, 이 노련한 정치가는 이 선택으로 자신의 정치 인생 중 큰 치욕을 맛보게 된다.
청와대 정무장관 박철언
박정희에게 김종필이 있었다면, 노태우에게는 박철언이 있었다. 전두환 집권기부터 줄곧 노태우의 곁에서 크게 일하였고 능력이 뛰어났다. '6공 황태자'라는 별명을 가질 정도의 2인자였다.
2. 민정 참패 과반 크게 미달
1988년 4월 26일
대통령 취임(1988.02.25) 두달 후 치뤄진 제13대 총선에서 여당 민주정의당이 참패하고 야당이 승리하는 여소야대 정국이 형성된다.
위 사진 자료에 나와있는 의석 수는 비례대표를 제외한 수인데 비례대표를 포함할 시의 최종 결과는 아래와 같다.
대선 단일화 실패로 원수지간이 된 두 사람과 그 두 사람이 평생을 싸워온 박정희 정권의 제2인자
이 세 사람이 힘을 합쳐 대통령과 여당을 쥐락펴락할 수 있는 힘을 갖게 된 것이었다.
대통령은 야권에서 줄곧 대립해왔던 두 명의 지도자 김영삼과 김대중이 이끄는 전투적인 야당과 비록 자신에게 처세술을 알려주어 살얼음판같은 2인자의 자리를 지킬 수 있게끔 했지만 전두환에 의해 자신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부정축재자로 몰린 적이 있던 김종필 모두가 위협적이었다.
제13대 대선 당시 노태우는 공약으로 '임기 중 중간평가'를 내세웠다.
대통령에 당선된 후 임기 중간에 자신에 대한 평가를 받겠다고 내세운 것이었는데 대선에서는 2등이었지만, 총선에서 3등의 성적을 얻어 체면은 구긴 김영삼이 대통령에 대한 중간평가 공약을 지키라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김영삼은 이를 두고 노태우의 임기 중 평가를 국민투표로 실시하여 노태우 정부에 대한 부정적 평가를 이끌어내 대통령직 사임을 요구할 계산이었다.
그러나 김대중과 김종필의 생각은 달랐다. 안 그래도 사회가 시끄러운 마당에 중간평가까지 하여 혼란을 가속화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었다.
김영삼은 조급해졌다. 야권에서의 입지를 자신에게 유리하게끔 전환시켜야 했고 이 방법이 노태우에 대한 중간평가로 정권을 압박하는 것이었는데 실패한 것이었다.
4. 노태우, 전두환을 버리다
광주사태에 대한 진상조사는 김영삼과 김대중, 민주화 세력에게 있어서는 반드시 풀어야할 숙제였다. 그들은 대통령 단일화에 실패하여 민주화 세력에게 실망감을 안겼던 과오가 있으며 이를 만회하기 위해서는 이 특종을 선점하여 전두환을 처벌함으로써 만회해야했다.
삼김은 노태우를 압박했다. 광주사태와 5공화국 비리 등에 대한 청문회의 개최를 요청하였고 여소야대의 정국에서 대통령은 향후 5년간 나라를 이끌어나가며 야당의 협조가 절실하였기에 이에 승낙하게 된다.
5공비리에 대한 조사로 인해 전 대통령 전두환의 동생인 전경환이 구속되었다. 그는 형인 전두환이 대통령에 재임중일 때 새마을 운동본부 총재를 역임한 바 있는데 이때의 비리 때문에 구속에 이르기까지 하였고 이는 곧 민주화 시대의 국민들을 충분히 분노케하기 쉬운 이슈였다.
1988년 9월 17일
혼란스러운 정국 속에 대통령은 국가적 대경사인 88올림픽의 개최를 선언하였고 88올림픽은 대한민국의 경제적 발전과 위상을 세계에 떨치며 성공적으로 치루어졌다.
다만, 대외적으로는 한국의 기상을 높이 떨쳤으나 대내적으로는 전 정부를 볶아대며 최종적으로 전두환의 출석을 요구하는 청문회가 지속되고 있었다. 날이 가면 갈수록 청문회의 열기는 뜨거워졌고, 야당의 세는 강해졌다.
1988년 11월 19일
서울에서 전두환 구속, 노태우 퇴진을 외치는 1만명이 운집하는 시위가 발생하였다. 원내, 원외 할 것 없이 광주사태의 책임자 전두환을 처벌하는 목소리가 커졌고 덩달아 노태우 정권의 퇴진까지 주장하는 시위가 한순간에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1988년 11월 23일
민주화 시대의 개막으로 한순간에 터져나온 목소리들은 정부를 위협하기에 충분했다.
전 대통령 전두환이 5공화국 정부에 대한 비리, 측근들의 비리 등에 대해 대국민사과를 표명하고 강원도 인제군에 위치한 백담사로 떠나게 된다.
노태우 회고록에 근거하면, 전두환이 백담사로 가기 전날 노태우에게 전화를 걸어 "각하에게 도움이 된다면 내가 가겠다"고 했다고 한다.
5. 대통령의 고심
1989년 12월 31일
대통령은 1년 넘게 지속되고 있는 청문회로 인해 골머리를 앓았다. 정부의 성공을 위해 더 이상 청문회 정국으로 이끌려다닐 수 없다고 판단,
전두환을 청문회에 세우라는 야당의 조건을 받아들여 80년대의 마지막 날 전 대통령이 온 국민이 지켜보는 청문회에 출석하여 증언을 하게 된다.
그렇게 1990년이 밝았다.
세계 정세는 급격하게 변화하고 있었다. 2차세계대전의 종전 이후 줄곧 이어져온 냉전이 끝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대통령은 자신이 맡은 대통령의 직무를 소홀히 할 생각이 없었고 민주화 이후 대한민국을 안정시키는 것과 동시에 공산권과 수교를 진행하려는 북방정책을 구상하고 있었다.
자고로 정부가 일을 잘 하려면 여당이 뒤를 받쳐주어야 한다. 그러나 위에 밝혔다시피 총선의 패배로 여당은 힘없이 야당에 이끌어다니기만 할 뿐 독자적으로 일을 구상하고 진행할 여력조차 없었던 것이 현실이었다.
대통령은 여소야대 정국을 타파하고 싶어했다.
5. "각하, 자민당처럼 보수대연합을 하셔야 합니다."
박철언은 노태우 대통령 영부인 김옥숙의 고종사촌이다. 전두환 대통령 집권기에 정무비서관, 법무비서관 등을 역임했으며 안기부(현재의 국정원) 국가안전기획부장 특별보좌관 등의 직위를 수행했다.
제13대 대선 당시 박철언은 노태우를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였고 사람들은 그가 노태우 정권의 2인자라는 사실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는 최병렬 정무수석비서관과 함께 대통령에게 일본의 자민당처럼 합당을 하여 여소야대 난국을 헤쳐나갈 것을 제의했다.
자유민주당, 약칭 자민당. 1955년 일본민주당과 일본자유당이 합당하여 생겨난 정당으로 1990년 기준, 벌써 35년간 거대집권여당의 행보를 이어가고 있는 정당이었다.
대통령은 이를 옳게 여기고 삼김과의 합당, 대연합을 위해 움직이기 시작한다.
6. 김대중과의 합당?
노태우는 우선 김대중과 접촉했다. 그는 김대중과의 비공개 영수회담에서 광주사태의 처리권한을 제시하며 합당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대통령은 성향이 다른 김대중과의 통합으로 민주화 이후 정부를 압박하는 야권을 잠재우고 지역감정의 해소를 이끌어낼 수 있으리라 판단했다.
그러나 김대중이 누구인가? 13대 대선에서 호남의 몰표를 받고, 사자필승론으로 지역감정 황색바람을 일으킨 선동의 대가다. 당시의 현재도 그렇거니와 앞으로 자신의 정치인생의 텃밭인 호남의 통수를 칠 리가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이 박정희, 전두환 정권에 항거하여 살아온 사람이니만큼 그 정권의 연장선에 있는 대통령과의 합당은 할 수 없지만 정부와 여당에 협조하겠다고 거절 의사를 밝혔다.
8. 김영삼의 위기감과 대통령의 제안
김종필은 전두환의 등장으로 온갖 수모를 겪은 그를 배려해준 노태우에게 2인자로써의 처세에 대해 조언해주었다. 김종필은 누구나 알다시피 노태우와 같은 보수성향의 정치인이며, 그 정당인 신민주공화당 또한 보수주의를 표방했다. 그는 합당에 호의적이었다.
다만, 여기서 중요하게 넘겨짓고 가야할 문제가 있다.
김종필은 박정희 정권의 공신이자 2인자, 후계자였다.
그런데 박정희의 3선 개헌과 유신 헌법 개헌으로 인하여 대통령의 자리에 오르지 못했고 박정희 사후에는 전두환의 등장으로 오히려 부정축재자로 지목되어 정계에서 은퇴당했다.
또한, 제13대 대선에서는 182만여 표(8.1%)의 저조한 득표율을 얻고 낙선했다. 그는 대통령의 꿈을 져버리지 못했지만, 현실 감각이 뛰어난 이 정치인은 현실을 인정했다.
'내 생애 살아서는 대통령에 당선되지 못한다'라는 것을...
이로 인해 김종필은 대통령은 아니지만 국가를 운영할 수 있는 자리를 고집하게 되니, 그가 합당의 대가로 내세운 것이 바로 의헌 내각제로의 개헌이었다.
김영삼은 제7대 대통령 선거 경선에서 40대의 나이였던 그때 그는 이미 김대중에게 한번 패배를 한 적이 있었다.
그때는 패배를 인정했다. 독재자 박정희를 이기기 위해, 이 땅에 민주화를 안착시키기 위해서는 그럴 수 있었다.
그러나 전두환의 등장으로 대통령의 꿈은 멀어져만 갔고
수 년을 기다려 얻은 기회는 그의 친구이자 후계자인 노태우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김영삼의 입장을 생각해보자. 김영삼은 이미 제7대 대선 당시 김대중과의 경선에서 패배를 인정하고 김대중을 지원했다. 그런데, 이번 대선에서 김대중은 양보를 하지 않고 자신 또한 출마하여 야권의 표가 갈려 패배했다.
게다가 이 김대중보다 못한 총선에서의 성적. 김영삼은 치욕스러웠고 창피하였으며 부끄러웠고 초조했다.
그런데, 이렇게 절망스러운 상황 놓여진 그에게 하늘에서 동아줄이 내려왔으니...
그것은 바로 대통령의 합당 제안이었다.
9. "JP를 끼면 이미지가 나빠져서 안돼"
김영삼은 박정희 정권 초기부터 줄곧 정부여당에 맞서 싸우며 살아왔다. 박정희에 의해 의원직에서 제명 당하고, 이는 곧 박정희의 죽음으로 이어지게 되는 등 박정희와는 악연이면 악연이었지, 절대로 좋은 인연으로 엮이지는 않았었다.
그런데다가 또 자기가 반대했던 전두환 정권의 연장선에 있는 노태우의 정당과 합당을 하는데 박정희 정권의 2인자였던 김종필까지 들어간다?
꼬장꼬장한 성격의 김영삼이 이를 용납할 수 없었다. 바로 난리를 치기 시작했다.
"김종필을 왜 끼나? 김종필을 끼면 당 이미지가 나빠져서 절대 안된다."
결국에는 박철언의 계속된 설득에 의해 김영삼은 자신의 입장을 어느 정도 굽혔다. 대신 한 마디를 덧붙였다.
"김종필은 그냥 껴주는거지, 주류가 되선 안 된다."
10. "내각제 개헌은 비밀로 하자"
민주정의당,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의 합당이 기정사실화 되고 이제 공표하기 전 이들은 최종점검을 실시했다.
제13대 국회 이내에 내각제 개헌을 실시하고 제14대 총선이 끝나면 김영삼이 당 총재를 맡는다.
거의 김영삼에게 당권을 양도하는 수준이었으며 김영삼은 이 합당으로 가장 큰 이득을 본 수혜자가 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김영삼은 노태우와 김종필에게 한 가지를 요구한다. 바로 "내각제 개헌에 대한 이야기를 국민들에게 꺼내지 말아달라"는 것이었다.
1. 내각제 개헌에 대한 국민들의 거부가 있을 것이다. 2. 평민당(김대중)의 극렬한 반대가 있을 것이다. 3. 아직 통민당(김영삼) 소속 의원들에게 충분한 설명을 하지 못했다.
노태우와 김종필은 이를 받아들여줬다. 그러나 이 요구를 들어준 것은 그들에게 있어서 크나큰 실수였다...
11. 그 날
1990년 1월 22일
민주정의당,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 3개의 정당이 합당하여 217석의 거대여당 민주자유당이 탄생한다. 128석의 민주정의당은 합당으로 과반 의석을 차지하였으며, 김대중의 평화민주당은 이를 강력하게 비난했다.
김대중이 난리를 치건 말건 각기 속이 다른 세 사람이 모여 새 정당의 탄생과 앞으로의 동거를 위해 축배를 들기 시작했다.
현재의 자유한국당의 전신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12. 그 후..
김영삼은 합당에 대한 정보를 자신의 최측근들에게만 설명했다. 갑자기 합당 소식을 들은 통일민주당 소속 국회의원들 중 이에 반대하는 이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당시 김영삼이 영입했던 노무현의 경우에도 그러했다.
대개 김영삼에게 반발했던 의원들은 김영삼의 설득으로 민주자유당 당적을 유지하였으나 이를 반대한 몇명의 의원들은 이를 따르지 않고 탈당하여 민주당(약칭 꼬마민주당)을 창당하게 된다.
김영삼은 협의했던 것과 같이 새롭게 창당된 민주자유당의 당 총재가 되었다. 그는 당권을 쥐게 되자 180도 돌변하였고 정권의 핵심이었던 박철언과 사사건건 대립했다.
결국 이 길고 긴 싸움에서 박철언이 패배, 김영삼이 승리하였고 김영삼은 제14대 대통령 선거 민주자유당 후보로 출마, 김대중을 꺾고 꿈에 그리던 대통령에 당선된다.
박철언은 제14대 대선 당시 민주자유당을 탈당, 현대를 세운 정주영의 통일국민당에 입당하여 정주영을 도왔으나 패배했다.
김영삼이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 슬롯머신 사건으로 구속되었다.
김종필은 토사구팽 당했다.
합당 당시 약속했었던 내각제로의 개헌을 이루지 못하였고, 김영삼 정권 당시 민자당 내에서 김영삼계와 갈등을 반복한 끝에 탈당하여 자유민주연합을 창당했다.
김영삼 정권 말기
김영삼은 12.12사건과 5.18광주사태에 대한 책임을 물어 태우와 전두환을 법정에 세운다.
'전두환 사형, 노태우 무기징역'
이 둘은 제15대 대선 종료 후, 김대중이 취임하기 전에 석방되었다.
13. 현재
김영삼은 이른바 젊은 피 수혈을 주장하며 김무성을 비롯하여
당시 운동권이었던 김문수, 이재오, 손학규 등을 영입하였고
샐러리맨의 신화로 여겨지는 이명박을 정계에 영입하였다.
그때 김영삼이 영입했던 인물들이 지금의 대한민국 정치계에 이름을 남기는 사람들로 성장하게 되며 보수정당 계파 속 친박 세력과 대립을 하며 현재에 이르고 있다.
박철언을 구속하게끔 한 슬롯머신 사건을 지휘한 홍준표 또한 김영삼에 의해 정계에 영입되었다.
현재 대한민국 보수정당의 지지자들은 전 대통령 박근혜를 두고 그의 탄핵을 주도한 YS계열(비박)과 박근혜를 지지하는 친박 세력의 암투가 계속되고 있다.
진보세력(정당) 인지도가 낮아서 잘 언급되지 않는데, 한국 좌익세력의 역사와 그 양상을 간략하게 설명해보고자 한다.
좌익정당은 일제강점기의 한인사회당과 조선공산당,
해방 이후 남한의 남조선노동당(약칭 남로당), 이승만 정권 시절 조봉암의 진보당, 정당이 아닌 전위조직으로는 박정희 정권 시절의 통일혁명당과 남민전 등 역사 속에서 여럿 존재했지만
여기서 소개하는 좌익정당은 80년대 재야, 학생사회의 사상논쟁으로 형성된 운동권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1. 운동의 두 경향, 엔엘(NL)과 피디(PD)
80년 광주사태에 미국이 관여하고 미국이 전두환 정권을 사실상 승인하면서
운동권에는 기존과는 다른 경향이 대두한다. 70년대까지 민주화 진영에는 소수 급진파(남민전이나 통혁당 등)이 존재했지만,
주류는 반독재민주화, 미국식 자유주의를 지향했다. 야당에서 그나마 좌파적이었던 김대중조차도 박정희 정권을 비판하는 주요 근거로 '자유'의 부재를 들었고,
나중에는 미국에 의해 목숨을 구하기도 하는 아이러니가 있었다.
그러나 '오월광주'의 경험을 거치며 미국에 대한 반감이 운동진영 전반에 크게 생기게 된다.
이로 인해 이른바 반미자주화운동이 촉발되고, 기존에 소수였던 사회주의 이념이 주류로 올라서는데,
광주와 부산, 서울 등에서는 학생들이 미문화원을 방화하거나 점거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처음에 적극적으로 수용된 이념은 마르크스주의, 마르크스-레닌주의였다.
이미 60년대에 전투적인 학생조직이 있었고 조총련이라는 구심이 존재하는 일본에서
레닌, 모택동, 티토, 카스트로 등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이론이 학생사회에 전해지게 된다.
그러다가 1986년, 전국 대학가를 중심으로 하나의 문제적 팜플렛이 돌아다니기 시작한다.
바로 이른바 '강철서신'이다. 이 팜플렛은 대학가에 북한의 주체사상이 퍼지는데 기여했다. 여기서 '강철'이라는 필명을 사용한 사람은 김영환으로, 이석기와 함께 민족민주혁명당 사건으로 구속되기도 한,
주사파의 대부와도 같은 사람이지. 지금은 전향해서 북한민주화운동을 주장하고 있다.
주체사상은 맑시즘, 레닌주의보다 이론이 쉽고 명료했다.
또 과학과 이성을 강조한 레닌주의와 달리 품성과 대중, 민족주의를 말한 주체사상은
이성을 거부하고 양은냄비 들끓듯이 끓어대는 저열한 한국인들의 성향과도 맞아떨어졌다.
이 결과 주체사상을 지도이념으로 하는 NLPDR(민족해방 민중민주주의 혁명론)이
학생운동권의 다수파 지위를 차지하게 된다.
반대로 마르크스-레닌주의나 고전적 맑시즘을 지향하는 세력은
CA(제헌의회파)-ND(민족민주)-PD(민중민주) 등으로 계승되며 소수파의 자리로 남게 된다.
CA의 상당 부분은 NL로 떨어져 나가게 되고, 최종적으로 남은게 PD 정파들이다.
그렇다면 NL과 PD가 각기 다른 사회주의 이념을 지지한다는 것 이외의 차이점은 뭘까? 크게 보면 이 둘은 '한국 사회의 성격과 발전'단계에 따른 '변혁 수행의 방법론' 면에서 차이를 보인다고 할 수 있겠다.
PD는 한국이 미국 등 제국주의 국가에 예속되어 있기는 하지만, 이미 자본주의와 노동계급이 발달한,
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 체제로 보았기 때문에, 이 사회에서의 주요모순은 자본가(재벌)과 노동계급간의 모순이다.
따라서 러시아에서 성공했고 독일과 헝가리에서 시도된 인민민주주의 혁명(PDR)을 곧바로 수행해야 하는 것.
한편 NL은 한국이 미국 제국주의에 예속된, 식민지 반(半)자본주의 혹은 식민지 반봉건사회라고 보았다.
이런 사회에서는 사회주의적 생산관계를 수립하는 인민민주주의 혁명(PDR) 이전에 민족해방(NL) 과업을 실행해야 한다.
즉 미제국주의 그리고 그들과 결탁한 매국적인 지배세력(당시에는 신군부와 민정당, 재벌과 고급관료들)을 타도하고,
북한과의 연방제 통일을 실시해야 하는 것이지. 이 이론은 흔히 자주(반미자주화)-민주(반파쇼민주화)-통일(조국통일)이라는 3단계 과업으로 요약된다고 할 수 있다.
2. 6월항쟁과 노동자대투쟁
이렇게 대학사회에서 혁명 이념에 대한 논쟁이 거세질 즈음, 사회 전반에서 민주화에 대한 요구가 전개된다. 김영삼, 김대중같은 자유주의 야당뿐 아니라 좌파적인 운동권들도 여기에 가세하면서 말이다.
여기서 NL이 주도권을 잡는다. NL은 주체사상 특유의 '대중노선'에 기반하여
일반국민들이 이해하기 쉬운 '호헌철폐 독재타도', '직선제개헌'을 슬로건으로 내세운다.
이 슬로건은 범국민적인 지지를 받았고 결국 신군부는 6.29선언을 통해 민주화에 합의하게 된다.
정치적 자유화가 촉발되자 이제는 노동자들이 들고 일어난다.
기존 경제개발에서 열악한 처우를 감내해야 했던 산업역군들이 임금인상, 처우개선, 노조 인정 등을 요구하며 대규모 파업에 들어가게되었다. 그 일환으로 1987년 7월부터 9월까지 전개된 '노동자대투쟁'.
전국적 항쟁이었고, 특히 울산과 창원 등 경남 중화학공업 벨트에서 거셌다. 기존 진보진영의 주도권이 학생에게 있었다면, 이제는 노동운동도 그에 준하는 영역으로 격상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6월항쟁 이후 치뤄진 대선에서 민주화세력인 양김이 단일화하지 않고 분열한다. 결국 기존 신군부의 계승자로 인식되던 노태우 후보가 대통령이 되는 사태가 발생.
참고로 NL은 김대중을 '비판적' 지지했고, PD는 백기완이라는 사람을 독자후보 민중후보로 추대했다. 이는 NL과 PD의 사상적 차이에서 기인하지.
NL은 우선 인민민주주의 혁명 이전에 민족해방과 민주화부터 이루는게 중요하다고 보았기 때문.
3. 혁명의 종언과 지적 아노미
이렇듯 한국에서는 좌파적인 흐름이 강해지고 있었지만 전지구적으로는 반대 상황이 연출되고 있었다.
사회주의 이념모국 소련에서는 레닌 동상이 끌여내려지고, 동독에서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다.
중국에서는 인민의 군대가 인민을 학살하는 참극(천안문 사태)가 벌어진다. 이런 세계적 흐름에 많은 운동권 학생, 지식인들이 충격을 받아, 그때부터 이들은 다양한 흐름으로 분화되기 시작한다.
첫번째, 여전히 진보의 가치를 지키면서 다양한 전략을 모색하는 분파들.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약칭 전국연합), 현 한국진보연대의 전신이며 NL계열의 빅텐트격 단체이다. 소련과 달리 북한은 망하지 않았기 때문에, NL은 PD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분화하였다.
두번째, 민주당과 신한국당(현 자유한국당의 전신) 등 제도권 정당으로의 전향
세번째, 시민운동 혹은 포스트모더니즘에 기반한 새로운 운동 지향
과거의 '민중운동, 민족해방운동, 혁명운동'을 청산하고 온건한 '시민운동'의 추구.
박원순이 한국 시민운동계의 주요 인사이다. 그와 더불어 페미니즘, 생태운동 등에 대한 관심도 증폭된다.
4. 운동권의 입지 약화
이렇듯 세계적으로 자본주의와 자유주의가 대세로 되고, 사회주의 블록이 무너지는 과정에서
상당수 운동권들이 우경화되고, 운동진영에 대한 일반국민의 지지도 줄어들게 되었다. 보통 국민들은 '이미 민주화되었는데 무엇 때문에 그렇게 과격하게 투쟁을 하냐'와 같은 사고로 운동권을 바라보았다.
87년 6월항쟁과 달리 91년 5월투쟁은 결과적으로 실패한다.
기존 '전대협'을 발전적 계승한 '한총련', 위 사진은 한총련 2기 출범식. 조선대학교, 1994년
한총련이 주도한 '연세대사태'는 김영삼에 의해 진압당한다.
이종권씨 치사 사건, 이석씨 치사 사건 등으로 한총련은 국민적 지탄을 받게된다. (각각 전남대와 한양대에서, 학생들이 일반시민을 프락치로 오해하여 고문한 사건) 이렇게 사회적으로 고립되자 운동권은 더욱 강경해지게되는데,
한총련의 강경한 흐름에 반대한 온건NL과 온건PD가 '21세기진보학생연합'을 결성하기도 한다.
그러나 화려한 전성기는 오래가지 않고 곧 해소되었다.
5. 국민승리21, 그리고 민주노동당
이렇게 학생운동권이 입지 약화와 몰락을 거듭하고 있을때 쯤,
주로 학생운동권, 노동운동 출신으로 구성된 진보인사들은 합법정당 건설 운동에 몰두한다. 김영삼이 대통령 하던 시절인 97년 노동법 개정안이 날치기가 되자, 노동계는 위험을 직감하고 집권을 꿈꾸기 시작한다. 그래서 민주노총 아재들이 집권 해보자고 '국민승리21'이라는 조직을 결성,
그 유명한 권영길을 대통령 후보로 내세워 98 대선에 도전한다.
물론 김대중 슨상님이 당선이 되었다. 그러다가 2000년도, 국민승리21은 '우리도 정당 운동 제대로 한 번 해보자!' 하면서 민주노동당을 창당한다. 민주노동당은 2000년 총선에 출마했지만, 단 한 사람도 당선시키지 못하고 사장당한다.
그러다 전국연합에서 활동하던 NL들이 민주노동당에 들어가 야금야금 잠식하겠다는 계획을 세우게된다. 이게 그 유명한 '군자산의 약속'이다. 이런 상황에서 어마어마한 사건이 하나 터지게 되는데,
이른바 일심회 사건이라고, 아주 어마어마무시한 빨갱이 사건이었다.
민주노동당 당직자랑 당원들이 몰래 북한에 넘어가서 "조선로동당"에 가입했다가 적발된 것. 그때 난리가 났지만, 물론 민주노동당은 "국가정보원이 조작했다" 며 발광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때 민주노동당 내 NL계파와 PD계파가 있었는데 PD는 관련자들의 행위가 패당적이라고 보고 처벌을 요구했지만, 다수파였던 NL이 무시하고 흐지부지된다. 한편 민주노동당에 합류하지 않은 신좌파 성향의 '사회당'이라는 정당도 존재했다.
사회당은 '반자본주의 반조선노동당'을 기치로 북한을 억압적인 관료국가라며 비판했지. 이렇게 크게는 80년대에 형성된 NL과 PD의 해묵은 갈등,
그리고 그 정파 안에서도 다양한 의견으로 갈려 좌익세력은 싸움을 반복하게 된다.
7. 민주노동당의 분열과 진보신당
어쨌든 이 일심회 사건이 터지니까 민주노동당 내 온건PD계파(사회민주주의 성향)인 심상정, 노회찬이
일심화 사건 관련자를 당에서 제명시키자는 주장을 하게 된다. 그러자 NL이 '국정원 공안탄압 중단' 을 내세우며 극렬 저항하게 된다.
결국 당 대의원 대회에서 '일심회 관련자 제명안'을 심상정이 제출했다가 부결당한 뒤 PD계파가, "종북주의자랑 못해쳐먹겠네" 하면서 탄생한게 바로 '진보신당'이다. 2008년 민주노동당 종북세력과 결별하며 독자노선을 추구하게 된 것이다.
8. 아, 다시 통합하자!!
그러다가 2009년에 노무현이 투신 자살한 후, 이 자살한 노무현의 명예를 팔아먹으려고 만든게 바로 국민참여당이다.
그러나 지방선거에서 참패. 그러다가 2012년 총선이 다가오면서 여러 좌익세력들은 위기의식을 가지고 서루 규합하여 민주노동당 + 진보신당 + 국민참여당이 모여서
우리에게 아주 친숙한, 이 통합진보당을 만들어 낸다. 그리고 이들은 2012년 총선에서 무려 13명의 국회의원을 만들어 내는 쾌거를 이룬다. 이때도 좌익세력들은 이 기세로 2016년에 집권할 수 있겠다는 희망이 터져나오고 있었다. 물론 이때의 당선은 독자적인 역량이라기 보다는 민주당과의 협력으로 인한 결과였지만 말이다.
NL이 주구장창 주장해온 '민주대연합론'의 2012년 버젼인 '반MB 야권연대'가 실행되었다.
'민주대연합론'이란? 민주대연합론은 1930년대 코민테른의 '반파시즘 인민전선'에서 기초한 이론으로, 당장 사회주의를 추구하기 보다는, 한 사회에서 가장 '반동적'이고 '보수적'인 세력에 대항해 공산당부터 온건우파까지 다 단결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 이론은 이후 중국 베트남 조선 등 '사회주의 혁명 이전에 외세와 결탁한 매국노들부터 무찌르자' '양심적, 개혁적 자본가 분파와는 일단 협력하자(나중에 토사구팽하자)'는 민족해방이론에서도 차용한다.
NL은 한국을 미국의 식민지로 봤기 때문에 이런 20세기초중반 동아시아 독립운동가들이 사용했던 방식을 썼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점이, 유시민이 이끄는 '국민참여당계'는 원래 NL과 PD라는 진보진영 양대세력이 들어가지 않은 세력이다. 오히려 친노 성향으로 민주당에 가깝다고도 할 수 있다. 근데 이들은 왜 구좌파들과 통합을 했을까? 결론은 정치적 셈법에 따른 결과. 국민참여당계는 친노로서 당시 민주당 주류와는 조금 노선이 달랐고, 또 얘내는 자기들이 빠친채로 진보통합이 되면 진보가 민주당을 공격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노무현 시절 노무현을 가장 많이 공격한게 민주노총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통합과정에서 진통이 조금 발생한다.
우선 진보신당에서 통합진보당으로의 합류를 반대하던, 심상정 노회찬 조승수 등 온건PD보다 좀 더 급진적이던 세력들은 잔류해서 노동당으로 당명을 바꾸게 된다.
또 당시 민주노동당의 다수파였던 NL은 국민참여당계와의 원만한 관계
(얘내는 자유주의 지향이었으므로 사회주의 싫어함), 특유의 사회관(한국은 식민지이므로 사회주의 이전에 민족해방 혁명이 필요하다)으로 인해 사회주의 강령을 삭제했다. 이에 대한 당내 일부 세력의 비판이 있었지. NL에서도 상대적으로 계급성을 중시한 세력들은 강령 개정에 반대했다.
9. 아, 다시 분당
이렇듯 잘 나갈뻔 했던 통합진보당은, 추락의 일을 겪게된다. 통합진보당 비례경선에서 NL노선중 최대계파인 '경기동부'가 부정을 저질렀다는 의혹이 제기된 것이다. 그래서 자체 조사를 해보니까, 경선에서 발생한 문제로 '이석기 김재연 제명해라!' 의 결과가 나온 것이다.
그런데 NL이 보통 NL인가? NL 경기동부 애들은 이석기 김재연 부결안에 통과될 것으로 예상되자,
당 대의원 대회에 난입해서 머리끄덩이를 잡아채는 퍼포먼스를 선보인다. (근데 사실 부정경선은 경기동부 뿐만 아니라 PD와 유시민쪽도 저질렀었다. 오히려 유시민쪽이 제일 크게 저지름)